산상수훈에 나오는 팔복은 단지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특질만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팔복에 나와 있는 심령이 가난함, 애통함, 온유함, 깨끗함, 의에 목마름, 긍휼함-은 예수님 안에서 발견할 수 있고, 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안에서 드러나 실제 성품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팔복을 하나씩 따로 떼어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팔복의 성품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각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내적 성숙을 보여주는 특성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로 시작한 팔복은 점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우리 내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동시에 내면의 성숙이 이웃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실제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학자 존 스토트는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특성으로 설명하고, “긍휼이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그리고 의를 위하여 핍박 받는 자는 인간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예수님 제자의 특성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팔복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나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삶의 모습이고 열매입니다.

 

오늘 말씀은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입니다. 존 스토트의 설명에 따른다면 긍휼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인격적인 특징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긍휼한 마음을 품을 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긍휼은 동류 인간들을 향한 우리의 삶의 태도이고 또한 성품입니다.

 

긍휼이 여긴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마음으로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인가요? Homeless들을 보면서, “아 참 불쌍하다라고 마음에 떠오르는 감정을 말하는 것일까요? 물론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마음 안에서만 머문다면 그것은 진정한 긍휼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긍휼한 마음은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날 때 진정한 긍휼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단지 입술과 마음 안에 갇혀 있다면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긍휼, 자비, 인자는 성경에서 참 많이 볼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긍휼을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요?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이 없는 심판이 있으니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 (2:13). 긍휼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선한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끄는 동력이 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긍휼이 됩니다. 우리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부자는 거지 나사로를 멸시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또한 불쌍한 마음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거지 나사로를 무시합니다. 마음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이기는 긍휼은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긍휼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긍휼은 의미적인 단어라기 보다는 더 실천적이고 행동적인 단어입니다.

 

자비는 하나님의 성품인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닮아가야 하는 성품입니다. 예수님도 눅6:36절에서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 하나님의 정의는 자비를 바탕으로 실천되어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심판과 폭력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긍휼에 의해서 존재하고, 긍휼을 실천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긍휼이 없는 정의는 폭력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긍휼을 선택하셨습니다. 긍휼이 없는 하나님을 우리는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긍휼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인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예화 중에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예화에는 세 사람-제사장, 레위인 그리고 사마리아인-이 나옵니다. 이 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삶의 가치관을 통해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의 잣대에 삶의 바탕을 둔 사람들-제사장과 레위인-은 율법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갑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달랐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길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겨그를 돌보아 줍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따라 산, 그리고 종교적인 사람이 아니라 긍휼을 실천한사마리아인을 진정한 이웃이라고 말합니다.

 

긍휼은 행함을 유발하는 동력입니다. 실제적인 행동이고 구체적인 손길입니다. 우리는 길에서 본 홈리스들을 가엽게 여깁니다. 그리고 그냥 지나갑니다. 연민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성경이 말하는 긍휼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긍휼은 우리를 실제적인 행동으로 이끄는 동력/ 즉 동사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마리안 사람처럼 긍휼을 가진 진정한 이웃으로 살아가기 위해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1.    자비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움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고 말씀 하신 것처럼, 자비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자비, 긍휼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먼저 구약 성경에서 그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구약에서 자비, 긍휼, 친절의 의미로 사용된 단어는 헤세드 (chesedh)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에서 150번 이상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약90 퍼센트 정도가 하나님 또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말할 때 사용됩니다. 즉 자비는 하나님의 성품의 특성이고 그 분이 사람들에게 일하시는 동기입니다.

 

헤세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 “친절한, 긍휼한 마음을 표현 할 때 사용되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한 신실한 마음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중요한 성품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몇 가지 예를 찾아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30:3) 삼상20:14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9:17 ‘주께서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9:31 ‘주의 크신 긍휼로.’ 103:13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145:8,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3:12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단어는 하나님의 신실하고 변함없는 한결 같은 사랑의 마음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다시 말하면 자비, 긍휼의 마음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이고, 신실함의 표현입니다.

 

자비가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이라면, 그이 자녀 된 우리의 성품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복을 받기 위해 자비를 베푸는 자들이 아니라, 긍휼이 우리의 본질이기에 우리는 자비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비/긍휼하신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서로 서로에게 친절한 마음으로 대하기를 기대하십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저도 가을이와 봄이에게 늘 부탁하는 것이 있습니다. “서로에게 친절하게 말하고, 행동하기를.” 모든 부모의 마음일 것입니다.

 

호세아 4:1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분노하시는데 그 이유는,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자비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사위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뿐이요 강포하여 피가 피를 뒤대임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호세아 6:6, “나는 자비/친절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미가 6:8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는 것은 공의를 행하며, 인자/자비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스가랴7:8-14절 하나님의 심판의 이유 또한 자비를 잃어버린 백성을 향해 하신 말씀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처럼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자비가 하나님의 성품이고 하나님으로부 시작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비한 마음, 자비를 베푸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가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품에 동참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2.    우리가 먼저 긍휼을 받은 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 주인이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불쌍히 여겨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종은 나가서 그에게 백 데나리온 빚 진 동류를 만나 그에게 빚을 감을 것을 강요하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이 그를 잡아다가 말합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우리는 먼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이 여김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만한 어떤 조건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으로 말미암아 조건없은 용서/사랑을 받았기에 우리는 다른 사람을 조건없이 용서하고 사랑해야합니다. 조건없이 누군가에 자비로울 수 있다는 것 쉽지않습니다. 우리는 머무나 많이 조건적 삶에 익숙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긍휼은 조건없이 그분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가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먼저 긍휼을 받는 자임을 기억하는 겸손이 있기 때문입니다.  

 

 

3.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소중한 생명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전에도 말씀 드렸듯이 우리는 무엇보다도 사람을 먼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사람은 단지 나와 비슷한, 나와 동일한 문화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입니다. 나의 경계 안에 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나의 경계 밖에 있는 사람을 포함하여, 나와 종교가 같은 사람뿐만 아니라 나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을 향해서도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소중한 존재임을 기억할 때 우리는 서로에게 관대해지고, 자비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나의 경계 밖으로 쫓아낼 때 우리는 자주 자비를 잃어버리곤 합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우리를 책망하실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긍휼은 나와 다른 사람의 경계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허물어가는 구체적인 행위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사랑과 온유하고 긍휼이 많은 삶이었습니다. 좀처럼 화를 내는 것을 찾아 볼 수 없는 분이었지만 예수님이 종교지도자들에게 무섭게 화를 낸 적이 있습니다.

 

성전 바깥뜰에서 물건을 팔고 돈을 환전해 주는 상인들의 테이블을 엎고, 가축들을 채찍으로 내쫓으신 일입니다. 아마 제자들도 많이 당황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분노하는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바깥뜰은 이방인들이 들어와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성전에서 유일한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이방인들이 들어올 수 있는 권리마저 빼앗아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렇게 분노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에 대해/ 자신의 종교적, 민족적 경계 밖에 있었던 사람들에 대해서 무자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했다라고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십니다.

 

우리는 늘 벽을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를 보호하고,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하지만 예수님과 성령님은 인간과 인간이 만든 모든 벽을 허무셨습니다. 그 벽을 무너뜨리는 것은 바로 자비로운 마음입니다. 사랑의 마음입니다.

 

교회사를 보아도, 사람들은 늘 벽을 만듭니다. 성직자와 평신도들, 그리고 백인과 흑인들 사이에 벽을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간디의 일화입니다. 간디가 학창시절 산상수훈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어,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미사에 참석해서 설교를 들으려고 어떤 성당에 갔다가 입구에서 저지당했습니다. 문지기가 그에게, ‘미사에 참석하고 싶으면 흑인들을 위해 따로 마련된 성당으로 가는 것을 환영한다고 점잖게 말해 주었습니다. 간디는 떠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진정으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그의 자녀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피부의 색깔, 문화의 차이, 빈부의 차이, 귀족과 평민의 사이에 있는 벽은 허물어 질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려오는 이야기 중에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불자에게 말했다. “우리는 한 형제일 수도 있지요. 정말로, 하지만 그건 이상주의자들과 멍청이들을 위한 말입니다. 실제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들한테는 형제애란 신앙의 동일성에 달려 있지요.” 슬프도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워하기에는 충분한 종교를 지니고 있건만, 사랑하기에는 모자라는 종교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긍휼이 여기는 삶, 자비를 사랑하는 삶을 사는 첫 번째는 사람을 볼 때 외모가 아니라, “저 사람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나의 형제임을 먼저 기억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모든 어떤 귀중한 보석보다 도, 돈 보다 도, 명예 보다 도, 권력 보다 도 더 소중하고 귀한 존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긍휼이 없는 기독교는 교리를 강조합니다. 긍휼이 없는 종교는 율법을 강조합니다. 긍휼이 없는 기독교는 일을 강조합니다. 긍휼을 잃어버린 교회는 예수님을 잃어버린 교회입니다. 긍휼을 잃어버린 교회는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단체가 되어버립니다.

 

항상 어디에서나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율법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사람을 소중히 여기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긍휼이 여기사 고쳐주셨습니다. 긍휼은 율법을 뛰어넘고, 교리를 뛰어넘고, 우리의 목적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는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입니다. 그는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더 누가복음 10장에 나와 있는 사마리아 사람을 통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긍휼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죽어가는 원수, 유대인을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우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줍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이웃은 자비를 베푼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자비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자비/친절의 의미는 헤세드가 번역된 헬라어 엘레에몬의 기본어 엘레오스자비, 긍휼, 동정심, 불쌍히 여김, 친절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헬라어 엘레에몬은 행동이 함께 표현된 단어입니다. 감정적인 상태를 의미라기 보다는 행동을 유발하는 그리고 행위를 통해서 온전하게 드러내지는 단어입니다. 글렌 교수는 이 단어를 “compassion in action”이라고 번역합니다. “활동하는 긍휼, 베풀어지는 긍휼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행동하는 원리입니다. 긍휼은 마음을 움직이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손을 움직여 궁핍한 자를 돕게 합니다.

 

신명기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친족이 살고 있거든 너희는 인색한 마음으로 대하지 말아라 반드시 너희의 손을 그에게 펴서 그가 필요한만큼 넉넉하게 꾸어 주어라 너희는 반드시 손을 뻗어 너희의 땅에서 사는 가난하고 궁핍한 친족을 도와주어라.”

 

긍휼이 여기는 것은 손을 펴서 돕는 것입니다.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본 세 사람,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인 모두 그 사람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레위인과 제사장을 그를 피해 갑니다. 오직 사마리아 사람만이 그에게 가까이 가서 그를 도와줍니다. 자비는 단지 불쌍히 여기는 마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마음이 행위로 들어 날 때 자비는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윌리암 바클리는 긍휼에 대해 이렇게 정의합니다. “긍휼은 단지 곤경에 처한 사람을 보고 미안한 마음, 불쌍한 마음을 갖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히브리어 헤세드자비는 우리가 그 사람의 눈으로 상황을 볼 수 있을 때까지, 그 사람의 마음으로 상황을 생각할 수 있을 때까지, 그 사람의 감정으로 상황을 느낄 수 있을 때가지 다른 사람의 숨어있는 내면을 볼 수 있는 능력이다. 고로 자비는 다른 사람과 나를 동일시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사람의 감정으로 느끼고, 그 사람의 눈으로 보기 시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다시 말하면, 그 사람과 함께 그 상황을 경험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런 의미에서 긍휼는 내 자신의 중심성을 내려 놓은 것입니다. 내가 가진 기준과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필요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긍휼의 중심성은 내가 아니고 타자입니다. 하나님 마음의 중심에는 당신 자신이 아니고 죄인들인 우리가 있듯이 말입니다.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는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자신의 삶에 중심에 두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중심에 두고 살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