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복음이 무엇인가요? 복음은 개인적인가요? 공동체적인가요? 기쁜 소식은 무엇인가요? 내가 듣고 싶은 소식인가요? 아니면 하나님의 메시지인가요?

 

물론 복음은 두 가지를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복음을 너무나 개인적인 기쁜 소식에 초점을 두고 살아왔습니다. 신학적 용어를 사용한다면 칭의 ‘JUSTIFICATION’/죄로부터 구속의 기쁜 소식이 복음의 전부로 배워왔고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복음에서 칭의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복음에서 칭의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중생, 거듭남, 새 생명다시 말하면 바울의 표현처럼,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피조물의 자리는 너무나 작아졌습니다. 복음은 새 생명에 대한 기쁜 소식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에 대한 기쁜 소식입니다. 단지 내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자유케 되었다는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삶에 대한 기쁜 소식, 하나님 나라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땅에서 그리고 우리들 안에서 이루어 지고 있다는 기쁜 소식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느냐 죽어 있느냐라는 문제입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입니다. 그리스도 생명으로 인해 우리가 새로운 삶, 위로부터 오는 삶의 주체인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안에서 살고 있는가? 라는 매일의 도전입니다.  

 

복음이 새로운 생명, 새로운 삶, 하나님의 나라에 깊은 관계가 있다면 복음은 단지 개인적인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이고 사회적입니다. 복음-기쁜 소식을 뜻하는 헬라어 유앙겔리온은 개인적인 소식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단어의 유래는 그리스의 도시 국가에 한 사람이 가져온 기쁜 승리의 소식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는 먼 지역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그리스 도시 국가가 자유를 지키게 되었다는 공동체의 운명에 영향을 주는 기쁜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아나뱁티스트 신학자인 존 하워드 요더는 복음이란 사람들의 안녕과 깊이 관련된 좋은 소식이다라고 말합니다. 즉 복음은 단지 몇몇 사람에게만 좋은 소식이 아니라 우리 모두 공통의 삶을 보다 나은 모습으로 변화시킨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개인적이라기 보다는 공동체적이고 사회적입니다. 예수님이 전한 기쁜 소식은 단지 개인차원에서 머무는 구원이 아니라 공동체/사회적 삶에 해방/ 변화를 촉구하는 소식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임했다는 기쁜 소식, 하나님의 정의가 이 땅에서 이루어 진다는 기쁜 소식이 복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복음서에 말하는 복음은 공동체적이고 사회적입니다. 왜 갑자가 뜬금없이 복음에 관해 이야기 할까요? 복음과 의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오늘 읽은 말씀에 나오는 와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 특별히 칼빈의 신학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성경에서 나오는 를 개인적인 칭의-justification”로 혹은 “righteousness, 개인적인 의로 해석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서 말한 는 단지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의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사회적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의를 단지 개인적인 차원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복음을 개인적인 사건으로 축소하는 것과 같은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에 대한 이러한 오해가 개인주의적 신앙을 나았듯이, 의에 대한 오해 또한 교회 안에서 타인과는 전혀 상관없는 개인주의를 부추기게 합니다. 

 

먼저 의에 대해 묵상을 나누기 전에 배고픔과 목마름에 대한 잠깐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배고픔과 목마름을 일상생활에서 자주 경험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쉽게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예수님의 말을 듣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배고픔과 목마름은 우리의 경험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형제자매님은 죽음을 맛보는 배고픔과 목마름을 경험해 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없습니다. 제가 경험한 것은 금식을 위한 배고픔이었고, 목마름이었습니다. 전혀 생명과는 관계가 없는 상황에서 경험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앞에 나온 무리들의 배고픔은 목숨과 관련이 있습니다. 오늘 날 소말리아나 북한에서 기아로 죽어가는 많은 아이들처럼, 예수님 앞에 나온 무리들의 배고픔은 단지 간단한 간식으로 채울 수 있는 배고픔이 아니라 생명을 잃을 수 있는 배고픔이고 목마름이었습니다. 지금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늘 먹을 빵과 물입니다.

 

예수님이 오 천명을 먹이신 후에 다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옵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에 예수님을 다시 찾아 온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도 어쩌면 예수님께 빵을 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들을 향해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굶주린 사람이 음식을 구하는 심정과 목말라 죽어가는 사람이 물을 찾는 그 간절한 심정으로 너희는 의를 구하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는 의미는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이해하는 강도하고는 너무나 다릅니다. 더 도전적이고, 생명을 거는 간절한 열망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도전을 줍니다. 우리의 내면이 진정으로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쏟고 살아가고 있는지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간절한 갈망은 무엇입니까? 빵입니까? 물입니까? 성공입니까?돈입니까? 아니면 무엇을 향해 목마르고 배고파 합니까? 진정으로 형제자매님이 갈망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수님께 찾아온 젊은 부자 관원을 통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영생을 갈망하지만 여전히 세상의 것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한 젊은 부자 관원이 예수께 찾아와 묻습니다. “선생님,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이 대답합니다. “가서 네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이 말씀을 바꿔보면 이렇습니다. “너는 진정으로 영생을 얻기 위해 너의 모든 것을 팔 수 있느냐? 너는 영생,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위해서 너의 안락한 삶과 풍족한 삶을 다 포기 할 수 있느냐?”라는 말씀입니다. 젊은 부자 청년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하나님을 갈망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기를 소원합니다라고 말하지만 막상 예수님이 너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를 따라 오라말씀하시면 주저하는 나의 자화상이고, 우리의 모습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는 의미는 우리가 가끔씩 느끼는 배고픔과 갈증을 말하지 않습니다. 생명과 연관이 있습니다. 생명을 걸고 찾은 간절한 내면의 갈망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입니다. “유진 피터슨에 의하면, “하나님께 입맛 당기는 배고픔이고 목마름입니다.

 

오늘 읽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는 우리에게 강한 도전을 주는 말씀입니다. “생명을 걸고, 나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라도하나님을 찾으라는 도전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갈망한다면 나의 안락한 삶이라도 포기할 수 있느냐는 도전입니다. 하지만 또한 이 말씀이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너 의로운 자여, 너 의로움에 도달한 자여 복이 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를 갈망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갈증, 갈망이 있다면 그 자체가 복입니다. ‘그 배고픔과 목마름을 채워 주시겠다약속하십니다. 유진 피터슨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리 평생에 맛볼 최고의 음료이고 음식이 되어주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누리는 복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는 무엇일까요?  

 

로 번역된 헬라어 디카이오수네는 영어로 “justification, righteousness, justice”로 번역됩니다. 이 단어는 관계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세 영역에서 가 갖는 관계적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Justification”

칭의의 가장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의미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사랑을 기초로 한 관계입니다. 예수님의 청중들은 신명기에 나온 쉐마를 알고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로마의 압제와 종교 지도자들의 타락으로 인해, 일상 생활에 너무 힘들고 지쳐서 잊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다시 그들에게 그들이 구할 것은 쉐마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명기6:4)는 말씀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향한 목마름입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과 복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갈망하는 삶이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에는 시편 42편에서 하나님을 찾은 목마름입니다. “하나님, 사슴이 시냇물을 바닥에서 물을 찾아 헐떡이듯이 내 영혼이 주님을 찾아 헐떡입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합니다.” 에는 예레미아 선지자를 통해 하신 말씀- “너희가 나를 찾으면 나를 만날 것이다. 너희가 온전한 마음으로 나를 찾기만 하면 내가 너희를 만나 주겠다” (29:14)-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지난 주 영형제가 나눠주었던 것처럼, 예수님을 만나서 알고 싶은 갈망입니다.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찾은 것입니다. 생명을 다해 하나님을 찾은 것입니다. 내게 있는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만나고 싶어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찾은 마음을 풍족하게 만족하게 해준다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매일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것 그것이 바로 복입니다.

 

2.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 –“Righteousness”

 

헬라어 디카이오수네로 번역된 히브리어 두 단어는 미쉬팟쩨다카입니다.이 두 단어는 영어 성경에서는 “justice” “righteousness”로 번역합니다.

 

마쉬팟는 권위 있는 자의 올바른 결정을 의미 할 때 사용됩니다. 예를 들면, 구약에서 과부와 고아의 송사에 대해 공평하고 공정한 재판에 대해 말할 때 사용됩니다. 또 다른 예는 시장에서 사용되는 저울의 추를 정직하게 사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난한 자와 힘없는 자를 속이기 위해 거짓 추를 사용하는 자들이 심판을 받는 이유는 마쉬팟, 정의를 깨뜨렸기 때문입니다. 이 단어는 경제 활동과 법정에서의 특별히 가난하고, 힘이 없고, 상처받기 쉬운 자들에게 공정하고, 공평하게 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다른 단어 쩨다카노예로부터 해방 혹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공동체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정의를 가져오는의미가 있습니다.

 

정의와 의를 뜻하는 히브리 단어는 개인적인 의를 말하지 않습니다. 늘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 특별히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공평하고 공정하게 대할 때 이루어지는 의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는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입니다.

 

를 뜻하는 두 히브리어를 번역한 헬라어 디카이오수네진정한 내면의 선을 의미합니다. 이 진정한 내면의 선은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가식적으로 들어나는 위선이 아닙니다. 나를 보이기 위해서 만들어내는 선도 아닙니다. 긴 옷자락을 입고 보이기 위해 연보궤에 돈을 넣으며 나팔을 불던 바리새인들의 의는 더더욱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에 전적으로 복종하기에 이웃을 향해 드러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하신 말씀에 기초합니다. 나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들어나는 이웃에 대한 선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바리새인들의 의는 자신의 의였기에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하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는 나의 선이 들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의 의는 타인에 대한 긍휼한 마음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내면의 선-는 타인에 대한 긍휼과 사랑에 기초합니다.

 

이웃과 올바른 관계-사랑의 관계-를 갈망하며 삽시다.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를 갈망하는 자에게 예수님은 복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3.    사회적/ 공동체적 의-“Justice”

 

정의는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성경을 읽을 때 우리가 자주 놓치는 주제입니다. 우리가 복음과 의를 자주 개인적인 차원에서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개인적인 의로움으로 만족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구원으로 만족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의로운 삶을 사는 것으로 만족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는 사회정의와 관련됩니다. 사회정의 말하면 꼭 자유주의나 민중신학 혹은 해방신학의 전유물로 여기는 경항이 있습니다. 하지만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억압당하는 사람들이 해방되기를 구하는 것, 혹은 불의한 세상의 시스템에 반대하는 삶을 선택하는 행위들이 이 정의에 해당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서 공동체 전체에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 지도록 갈망하고 그 일에 헌신하는 자에게 약속된 복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개인의 거룩한 삶을 위해 십계명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가 샬롬, Shalom’의 자유 공동체가 되도록 십계명을 주셨고, 율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과 율법에는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어떻게 조화롭게 살 수 있는가에 대한 하나님의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십계명과 율법은 다 관계적이고 사회적인 법입니다. 공동체 전체가 함께 지켜야 하고 따라야 하는 법입니다. 이웃에 대한 배려, 약자에 대한 배려, 정의를 이루어가는 길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율법 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과 율법을 개인의 윤리적인 삶으로 축소 시켰습니다.

 

이런 잘못은 단지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만 범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 날 많은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개인의 의 혹은 구원 혹은 도덕적인 삶으로 강조합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머뭅니다. 그 이상을 갈 수가 없습니다. 내 죄 사함 받은 것으로 만족하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이 가진 원래의 의미, 공동체의 본질,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정의을 잃어버렸습니다. 정의를 말하면 어쩔 수 없이 기득권이 가진 특권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도 이젠 기득권을 소유한 특권층이 되어 버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슬픈 현실입니다.

 

정의하면 많은 영역에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분배라는 측면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묵상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의균등한 분배입니다. 혹은 일한 만큼 대우 받는 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의의 개념인지도 모릅니다. 물론 일한 만큼 대우 받는 사회, 균등하게 분배되는 사회를 이루는 것도 정의입니다.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런 개념으로 포도원 농장 주인과 노동자의 예화를 읽을 때 저는 이해 할 수가 없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아침 일찍 나가 사람을 데리고 와 농장에서 일을 시킵니다. 오전에도, 오후에도 그리고 저녁때가 다 되었을 때도 사람을 데리고 와서 일을 하게 합니다. 일을 마치고 농장주인은 모두에게 동일한 금액을 줍니다. 먼저 와서 더 많이 일한 사람에게 더 많이 줘야지 어떻게 늦게 온 사람과 일찍 와서 일한 사람과 똑 같은 임금을 줄 수 있는지 저는 이해 할 수 없었고, 제가 괜히 화가 난 적도 있었습니다. 제가 가진 정의 개념으로 이것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아마 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예화를 하나님의 은혜로 해석합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의 정의가 있습니다. 이 예화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집 주인이 하는 행위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일한 만큼 받는 것을 정의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시는 것이 정의라고 말합니다. 주인이 약속한 한 데라니온은 노동자가 하루에 받는 품값입니다. 이것은 한 노동자의 가족이 하루 최소한의 먹거리를 살 수 있는 돈입니다. 즉 하나님의 정의는 균등이라는 가치보다는 긍휼에 바탕을 둔 정의입니다. 필요한 만큼씩 나누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저와 준형제가 함께 농사를 짓습니다. 둘이 열심히 일해서 100만원을 벌었습니다. 우리의 정의는 50 50으로 균등하게 나누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정의는 40:60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제 식구는 4명이고 준 형제는 6명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의 필요한 만큼씩 나누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정의는 만나와 토지법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내려 주십니다. 그리고 각 가정이 먹을 만큼 즉 가족 수에 따라 하루 먹을 양을 거둬들이게 하셨습니다. 균등한 분배가 아니라 그 가족의 필요에 따라, 필요한 만큼 거두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 가서 땅을 분배 할 때도 하나님의 방법은 달랐습니다. 많은 이방의 나라들은 왕이나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 땅을 더 많이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때론 왕이 전쟁에서 공을 많이 세운 사람에게 땅을 상으로 더 주곤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세나, 여호수아나, 갈렙의 집안이나 혹은 전쟁에서 잘 싸운 용사들에게 더 많은 땅을 주신 것이 아니라 그 집안의 가족의 수에 따라 땅을 분배해 주었습니다.

 

공평의 원칙이 아니라 긍휼을 따라 하나님의 정의는 실현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의를 말씀하신 바로 다음에 긍휼이 여기는 자에 대해 말씀하시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공평의 원칙을 주장하지만 예수님은 긍휼과 사랑을 기초로 한 정의를 말씀하십니다.

 

긍휼을 따라 정의가 실현된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요? 수천억, 수조억씩 싸놓고 사는 재벌과 그들을 위해 하루에 열 시간 넘게 농장에서 일하고 한 달에 겨우 26달러를 받는 남미의 노동자들의 삶은 어떻게 변할까요? 너무 멀리 가지 말고,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변할까요?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필요에 따라 나누며 산다면은? 초대교회처럼 서로의 것을 나의 것이라 주장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나누고 산다면 우리는 어떻게 변할까요? 정말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존 요더는 말합니다. “예수와 우리의 우선적 의제는 죽음이나 불안이 아니라 불의와 불법이다. 위안이나 수용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서로 사랑하며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새로운 질서가 필요한 것이다. 곧 현 질서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또 다른 질서에 대한 임박한 약속, 하나님 나라의 정의의 실천은 복음이 말해야 하는 언어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과 의를 너무나 개인적인 차원으로 축소시키며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사랑의 관계를 갈망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과의 사랑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해 가야 합니다. 우리는 더 나아가 사회/공동체의 정의, 모두가 더불어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정의를 갈망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복음이고 의입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 그리고 공동체의 샬롬-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