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온유한 사람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떠한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부르나요? 온유함이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특징은 무엇입니까?

 

성경에는 온유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특별히 시편은 온유한 자가 누리는 복에 대해 말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온유한 자에게 정의로 인도하시고, 온유한 자에게 자신의 길을 가르치신다 (시편25:9)’고 말합니다. 시편 기자는 또한 하나님은 악인은 땅에서 멸하시고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고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할 것 (시편37:1)’이라고 고백합니다.  온유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품입니다. 왜냐면 온유는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용서하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했습니다. 온유는 또한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고 예수님의 성품인 온유는 그의 자녀들이 닮아가야 하는 성품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의 성품의 특징을 말할 때 온유한 사람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난폭하고, 강팍한 사람이 아니라 온유한 사람입니다. 한 사람의 성품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들어나는 그 사람의 실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한 사람의 내면의 성품은 반드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홀로 있을 때 숨길 수 있지만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는 절대로 숨길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성품입니다.

 

골 방안에 우리가 홀로 있을 때 우리는 타인에 대해 무한히 너그러워 질 수 있습니다. 골 방안에 홀로 있을 때 우리는 원수조차도 용서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타인과 대면할 때 드러나는 나의 성품이 나의 실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품은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성숙해지고 들어날 때에야 온전해집니다.

 

홀로 있을 때 내가 누구인가도 중요하지만 타인과 있을 때 나는 누구인가도 중요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홀로 있을 때 나와 타인과 함께 있을 때 내가 동일한 사람입니다. 온유의 사전적 의미는 성격, 태도가 온화하고 부드러움입니다. 온유와의 반대말은 포악’, ‘악독’, ‘난폭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타인에게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온유하고 부드러운 사람하면 약한 사람, 힘이 없는 사람, 줏대가 없는 사람, 고분고분한 사람, 또는 불의에 쉽게 굴종하는 사람 혹은 다른 사람에 의해 쉽게 좌우되는 사람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미지는 성경에서 말하는 온유한 사람하고는 많이 다릅니다.

 

온유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예수님 앞에 나온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그 당시에 가난하고, 연약하고 힘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강한 힘에 의해 굴복 당한 사람들, 지주로부터, 군인들로부터, 심지어는 세리들로부터 억압을 받아온 사람들입니다. 스스로는 자신과 가족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강함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강해지고 싶지만 강해질 수 없는 사람들, 그래서 누군가의 힘을 의지해서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열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전에도 말씀 드렸듯이, 예수님 당시 유대 민중들은 독립에 대한 강한 열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는 강해질 수도 없고, 로마로부터 독립을 할 수도 없는 사람들, 그래서 강한 메시아를 기대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앞에 나온 무리들, 약한 사람들이었지만 여전히 강함을 기대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땅의 회복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강한 메시아를 통해 이루어 지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 있는 무리들에게 필요한 사람은 온유한 사람이 아니라 그들을 이끌어 줄 강한 메시아였습니다. 나중에 빌라도 앞에 예수님이 섰을 때 사람들은 예수를 대신해서 민족주의자 바라바를 풀어달라고 외쳤던 이유도 예수님이 나약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땅의 회복을 위해 사람들은 강함을 열망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입니다. 이 말씀은 듣고 있던 사람들에게 충격이었습니다. 사람들의 가치관에 도전합니다. 로마에 대한 원망과 분노, 절망과 비탄이 깊어 질수록 그들의 마음에 찾아 오는 것은 복수입니다. 복수를 위해서는 강해져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힘이 아니라 온유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은 사람은 강한 힘을 의지하는 자가 아니라 온유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정말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게 될까요?  어느 시대나 강한 힘이 복을 누리곤 했습니다. 온유한 자가 아니라 강한 힘 있고, 욕심이 있는 자가 땅을 차지했습니다. 그들이 행복을 누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꾸만 반대의 말씀을 하십니다.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힘을 추구합니다. 경제적인 힘이든, 정치적인 힘이든 혹은 다른 힘이든 우리는 외적인 힘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보이는 힘-경제력, 권력, 학력-을 의지하고 그 안에서 안전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외적이 아니라 우리의 내적인 성품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됨됨이에 대해 많이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어떤 외적인 강한 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힘을 키우는 방법이 아니라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온유함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조화롭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성품입니다. 외적인 강함은 경쟁을 부추기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단절 시키지만 온유함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어 우리의 지경을 넓혀 줍니다.

 

성경에서 온유는 겸손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11:29),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4:1-2). 온유는 또한 관용과 함께 나옵니다.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고후10:1, 디도서3:2). 온유는 성내는 것과 비교해서 나오기도 합니다. “성내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모두 버리고, 온유한 마음으로 여러분 속에 심어주신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1:20-21). 여기에서 성내는 것은 다른 사람을 향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향해 성내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온유한 자가 하나님의 도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또한 성경은 온유한 자와 하나님의 정의를 함께 말합니다. 주님은, 온유한 사람을 공의로 인도하시며, 온유한 사람에게 당신의 뜻을 가르쳐 주신다” (시편25:9). 온유, 겸손 그리고 관용은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조화로운 관계를 세워가는데 필요한 성품입니다. 온유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온유는 무엇일까요?

 

먼저 성경적 의미를 살펴 보기 전에 교부들의 온유에 대한 가르침을 나누고자 합니다.

질문합니다. 형제 자매님, 온유한 사람입니까?

  

온유함은 오늘 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잃어버린 소중한 성품 중에 하나입니다. 풀러 신학교 총장 마우는 그의 저서 무례한 기독교에서 오늘 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잃어버린 온유한 성품에 대해 슬퍼했습니다. 초대 교회의 사도들뿐만 아니라 사막의 교부들도 온유의 영성을 강조합니다. “영성 생활의 목적은 훌륭한 금욕자, 지구력 있는 금식가, 결단성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온유한 사람이 되는 데 있다.” 하나님께서 온유한 사람에게 당신의 뜻을 가르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싶으십니까? 온유한 사람이 되십시오.

 

사막의 교부들은 성령의 신비적인 은사가 아니라 온유를 영적인 사람의 표지로 가르쳤습니다. 교부 에바그리우스는 온유가 그리스도를 인식하는 원천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어려운 수행을 할지라도 온유가 없다면 결코 그리스도의 신비를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음식과 음료를 절제하지만 마음속에 부당한 분노를 품고 있는 사람은 바다 한가운데서 분노의 악마가 조종하는 배와 같다.” 온유함을 잃어버린 신앙 생활은 외식적인 바리새인이 되는 지름길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놀라운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온유한 사람입니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아무리 체험한다 할지라도 폭력적인 사람은 결코 그리스도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예수님이 온유한 사람인데, 온유함에서 그리스도가 들어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리스도를 들어내는 것은 온유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먼저 사모해 할 것은 온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막의 교부들은 말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많은 사람을 끌어당긴다. 그는 사람들을 자신의 올바른 믿음으로 설득하거나 선교할 필요가 없다. 그의 온유함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 충분하다. 그의 온유함을 보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고 그 안에서 그분을 알아 뵙게 된다. 온유만이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하나님께 마음을 열게 하는 길이다.

 

온유는 참 영성을 알아보게 하는 기준입니다.  사람들은 외적으로 강한 사람이 아니라 온유한 사람에게서 그리스도를 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라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가 만난 온유한 사람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중에 저의 어머니는 참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외적으로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난한 집에 시집을 왔기에, 평생 넉넉하게 살아보지 못했습니다. 배우고 싶었지만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요즘 노인학교 다니는 것을 재미있어 합니다. 두 아들이 장애였습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본다면 무엇으로도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조건이 없었고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본 어머니는 가장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누구의 말에도 흔들지 않은 중심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를 보면 이사야 선지자의 말이 생각납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이사야26:3). 어머니는 무엇보다도 사람들에게 따뜻했습니다. 어린이나, 어른이나, 잘 사는 사람이나, 못 사는 사람이나 모두에게 동일하게 따뜻했고 부드러웠습니다. 특별히 어머니는 다른 사람에 대해 험담을 하지 않았습니다. 큰 어머니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에 대해 거짓을 이야기 할 때도 어머니는 큰 어머니께 온유하게 대하셨고 조카들에게 참 따뜻하게 잘 해 주셨습니다.

 

사촌 누나가 집에 왔을 때 저의 어머니께 하는 말을 듣고 처음으로 온유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힘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작은 어머니는 보면 참 온유하다는 것을 느껴요. 그리고 엄마에게서 보지 못하는 것을 봐요. 작은 어머니를 보면 예수님을 보는 것 같아요.”

 

사촌 누나는 어머니의 다른 면이 아니라 온유함을 통해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이 고백은 저에게 큰 도전이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제가 듣고 싶었던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촌 누나가 어머니를 통해 예수님을 볼 수 있었던 이유는 온유였습니다.

 

사도들과 교부들이 말했던 것처럼, 온유는 그리스도를 들어내는 성품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온유를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온유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모세와 예수님입니다. 이 두 사람을 통해 온유한 사람이 갖는 특성을 묵상하고 나누고자 합니다.

 

온유로 번역된 헬라어 프라우스, praus는 히브리어 anaw, 아나오를 번역한 것입니다. 히브리어 anaw겸손한 humble, 비천한 lowly, 온유한 meek,”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인도와 하나님의 섭리를 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를 겸손이 받아들이는 사람을 묘사할 때 사용됩니다. 다시 말하면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하는 삶이 비록 힘들고 고난의 길이라 할 지라도, 혹은 나의 뜻과는 반대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가장 선한 것임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께 사랑 받으며, 그는 하나님이 온유한 자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힘을 얻는 사람입니다.

 

온유를 뜻하는 헬라어, “praus와 히브리어 anaw는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태도를 나타낼 때 사용되고, 또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를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성경 주석학자 매튜 헨리는 이 단어의 특징을 기초로 해서 온유한 사람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그의 말씀과 그의 징계에 복종하는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길을 따르며, 그의 계획에 동의하며, 인간들에게 관대하게 대하는 사람들이다.”

 

온유는 하나님을 향한, 그리고 다른 사람을 향한 그리고 자신을 향해 드러나는 마음이고 태도입니다.

 

1.    하나님을 향하여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위에서 말했듯이 온유를 의미하는 헬라어와 히브리어 단어에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내어드리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신약학자 글렌 교수는 이 헬라어를 온유한 자라는 단어 대신에,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 사람이라고 번역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길들어진 사람들입니다. 모세와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향해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왜일까요? 모세의 삶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모세는 이스라엘, 노예의 아들로 태어나 이집트 왕궁에서 왕자로 자랍니다. 그리고 그의 나이 사십이 되어서 유대인 노예를 때리던 이집트 군인을 죽이고 사막으로 도망칩니다. 사막에서 양을 치며 사십 년을 삽니다. 어느 날 그는 불에 타고 있는 가시덤불을 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집트 바로의 왕자가 아니라 약한 자가 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스스로 할 수 있다고 믿었을 때가 아니라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고 느꼈을 때 그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고, 그를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 지도자로 보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자신의 연약함을 알았고, 바로의 강한 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로에게 가는 것은 곧 죽으러 가는 것입니다. 그냥 목동으로 남은 여생을 살아가는 것이 모세에게는 더 안전하고 편한 삶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바로에게 갑니다.

 

전적인 순종입니다. 자신의 두려움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연약함을 아는 동시에 전적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사람입니다. 이런 모세를 하나님은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와 반대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집트 왕 바로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말씀하실 때 마음을 완강하여, 마음이 강팍하여, 고집을 부려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나의 의로 가득한 사람, 나의 교만으로 가득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하나님은 마음이 굳고 목이 곧은 사람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온유함과는 먼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온유한 자, 마음이 부드러운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입니다.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마음이 온유한 예수님은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관심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하신 기도에서도 예수님의 순종하는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뜻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자신 을 통해 이루어 지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늘 온유하고 관용을 베푸는 사람입니다.

 

2.    사람을 향하여

 

온유함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온화하고 관용적인 태도입니다. 바울은 권면합니다. “아무도 비방하지 말고, 싸우지 말고, 관용하게 하며,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온유하게 대하게 하십시오. ” (디도서3:2). 쉬운 성경은 온유를 부드럽고 공손하게로 풀어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내어드린 사람은 그 사람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에 타인에게 무례하지 않습니다.

 

로이드 존슨 목사는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온유함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게 솔직해져서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은 비교적 쉽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그렇게 말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얼마나 더 어려운지, 나는 본능적으로 그것에 분개한다. 누구나 다른 사람이 우리를 정죄하도록 허용하기보다는 우리가 스스로를 정죄하는 편을 더 좋아한다.”

 

골방에 앉아 기도할 때 우리는 죄인임을 인정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타인과 마주 앉아 있을 때 우리는 언제나 의인이 되려고 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나에 대한 서운한 말을 하든지, 나의 잘못을 지적하면 나는 화가 납니다. 누군가가 나를 비난하면 참지 못합니다. 특별히 아주 가까운 사람, 아내가 나의 실수를 지적할 때 화가 많이 납니다.

 

온유한 사람은 성내지 않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성내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모두 버리고, 온유한 마음으로 여러분 속에 심어주신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1:20-21).

 

이런 의미에서 온유한 사람은 잘 듣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우려 들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수용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말해 주는 사람으로부터, 심지어는 자신을 비방하는 사람의 말로부터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는 사람입니다.

 

온유함은 다른 사람들과 관련된 태도와 행동으로 표현되는 나의 실제입니다. 사랑은 온유하며.. 하나님과 우리는, 그리고 나와 타인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어진 관계입니다. 우리는 남남이었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그 사랑은 바로 온유입니다. 서로에 대한 온유한 사랑은 타인에 대해 너그러운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정죄하거나 비판하거나, 차별하지 않습니다.

 

3.    자신을 향하여

 

온유로 번역된 헬라어 프라우스 praus는 너무 무모하지도 않고 너무 비겁하지 않은 상태, 다시 말하면 균형 잡힌 용기를 표현할 때 사용된다고 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비난의 말을 수용하는 사람이고, 쉽게 복수를 하지 않은 사람이며, 쉽게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며, 분노와 슬픔과 두려움의 상황에서도 평온함과 안정된 마음을 유지하는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화를 내야 할 때와 화를 내지 말아야 할 때를 아는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discipline, 절제를 아는 사람입니다.

 

한 성경학자는 복음서에 나오는 온유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성품이라고 말합니다. “안락함과 지각과 확신의 부족과, 다른 감정의 탁월성을 좋아하는 마음에서 생겨나는 자연적인 심령의 온유함이 있는데, 이것은 복음서의 온유함과 신중히 구별해야 한다. 축복을 동반하는 온유함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리고 매우 격렬하고 과격하며 성미가 급하고 달래기 어려운 기질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써, 그들의 기질을 억제하는 방법과 노함을 저지하는 방법과 사나운 언행으로 공격하는 것을 피하는 방법과 해하는 자를 용서하고 양보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맞긴 사람이기에, 이 절제는 “self-controlled, 자제력이라기 보다는 “God-controlled,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는 절제입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화를 낼 때와 화를 내지 않을 때를 뒤돌아 보면 온유가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천성적으로 화를 잘 내지 않은 편입니다. 어머니의 성품을 물려 받아서 그런지 남에게 쉽게 화를 내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괜히 화를 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 날들을 되돌아 보면 내가 피곤하거나 바쁜 날이 아니라 내 스스로 게으름을 핀 날입니다. 식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묵상과 기도를 하지 않고 신문과 인터넷을 많이 한 날, 그래서 스스로게 화가 난 날이면 아이들과 아내에게 괜히 짜증을 부리는 제 모습을 봅니다. 하지만 그 반대로 아주 바쁘고 힘든 육체 노동을 한 날이지만, 내가 하나님 안에 있는 평화를 맛 볼 때 저는 아이들과 아내에게 참 온유한 아빠이고 남편이 되는 저를 봅니다. 온유는 예수님의 성품이기에 내가 예수님 안에 온전히 머무를 때, 온유는 내 안에서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4.    죄악을 향해서

 

온유는 불의와 타협하거나 굴복하는 나약함이 아닙니다. 온유는 하나님의 성품이고,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형성된 성품이기에 오히려 하나님과 멀어져 가는 죄와 맞서는 성품입니다.

 

온유한 사람, 모세를 봅니다. 모세가 40일간 산에서 금식 한 후에,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을 새긴 돌 판을 들고 산 아래로 내려옵니다. 산 아래에서 황금 송아지 앞에서 춤추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았을 때 그는 분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 우상을 섬기는 죄악을 보았을 때 그는 그들의 죄에 대해 분노하고 책망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절하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자신의 생명을 걸고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해 달라고 중재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악에 굴복 당하지 않습니다. 온유는 하나님과 멀어져 가는 죄는 미워하지만, 사람은 미워하지 않은 마음입니다. 사람에 대해 분노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용서하고자 하는 태도입니다.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사랑이 넘치는 삶이었습니다. 아픈 자, 죄 지은 여인, 세리.. 무수히 많은 죄인들과쇠외된 사람들에게 참으로 따뜻했던 예수님이시지만 하나님의 성전에서 물건을 팔고, 돈을 환전해 주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만인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책망하시며 그들을 성전 뜰에서 내쫓으셨습니다.

 

악에 대해 분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분노는 단지 성전 뜰 안에서 물건을 판 행위 때문 만이 아니었습니다. 성전 바깥 뜰은 이방인들이 들어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공간마저 빼앗아 버린 종교지도자들의 악에 대해 예수님은 분노 하셨던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을 막아버린 종교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은 분노하셨습니다.

 

온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벗어난 죄악에 대해서는 분노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지은 사람에 대해서는 한 없는 관용의 마음으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사람은 세상의 흐름에 순응하며 사는 사람을 부르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되는 삶을 선택하는 사람,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사는 사람을 지칭할 때 쓰이는 말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연약함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연약함을 자랑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했던 것처럼, 오히려 나는 나의 연약함을 주님 안에서 자랑하노라.

 

정리하면, 온유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열매 맺어야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온유는 온전한 순종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온유는 부드러운 관용을, 자신을 향해서 온유는 절제를, 죄악에 대할 때 온유는 거룩한 분노를 실제적인 모습으로 드러내는 성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