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 특별히 팔복을 묵상할 때 우리는 현재의 삶이 아니라 죽은 이후에 경험하는, 천국에서 받는 보상으로 적용하고 싶은 유혹에 빠집니다. 팔복에 나와 있는 복들은 현실 세계의 가치관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팔복은 천국의 복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천국-하나님 나라-이 저희 것임이요하지만 또한 하나님 나라는 지금 이곳에서도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안에서 이루어지고 확장되어 가는 나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팔복은 오늘 이곳에서 이루어 지는 삶을 또한 말하고 있습니다.

 

팔복을 묵상할 때 다른 유혹은 팔복을 우리의 영적인 상태에 대한 보상이나 결과로 이해하는 경향입니다. 다시 말하면, 만약 우리가 심령이 가난하면 천국을 복으로 받는 다든지, ‘만약 ..하면그 결과로 주어지는 복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천국을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은 어떤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팔복은 예수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 지금 가까이 와 있는 하나님 나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들이 경험하게 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영적인 이야기만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단지 천국의 삶만을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복음을 땅으로 가지고 내려 오셔서 그 나라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땅으로 내려 오셔서 땅의 깨어 진 삶을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삶으로 들어 올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삶이 하나님 나라의 삶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팔복을 통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사회적 통념에 도전하셨습니다.

 

팔복은 듣기에 좋은 말씀이 아닙니다. 영적으로만 생각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일 것입니다. 하자만 팔복은 치열한 현실의 삶이 묻어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 가난하고 고통과 아픔에 애통하는 자들에게는 위로가 되는 말씀이었을지 모르지만, 사회의 강자, 부자들이 듣기에는 거북한 말씀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일반적인 가치관, 통념을 깨는 말씀이었습니다.

 

가장 강한 도전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부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누가는 이 부분을 특별히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도 그렇듯이 당시 유대인들도 부는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은총이라고 여겼습니다. 다시 말하면 부는 하나님의 축복이요, 가난은 저주라는 통념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아마 타락한 종교지도자들과 사두개인들이 자신들의 부를 정당화 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렇게 강조했었는지도 모릅니다. 역사적 기록으로부터 발견하는 것은 그 당시 부자는 포도원 100, 토지 100, 노예 100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의 10% 아주 부자였고, 나머지 90%로는 빈민층이었다고 합니다.

 

부가 하나님의 은총이라면 유대인의 단지 10%로만 복을 받은 사람들이고 나머지는 하나님의 은총에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기준으로 본다면 지금 예수님 앞에 나온 무리의 대부분은 하나님 나라와 멀리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에 따른다면 그 무리들은 하나님 밖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가난한 자들이, 울고 있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고,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부자가 복이 있고, 연회에서 웃고 있는 자가 복이 있다는 사회적 가치관을 깨고 있습니다. 이런 도전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예가 부자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율법을 지키면 산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나옵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너의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대답합니다. 그는 고민하고 그 자리를 떠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합니다. 부자가 스스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즉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서.. 그러자 부는 곧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생각했던 제자들이 놀랍니다.

 

예수님은 듣고 있던 무리들에게 말씀합니다. 부자와 바리새인들이 아니라 바로 너희에게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너희가 누구든지 상관없이 너희 앞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 올 수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팔복이 가지고 있는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는 버림받은 사람들, 그 시대 통념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 그들 스스로 전혀 내 세울게 없었던 사람들, 세상에서 별 볼일 없는 사람들-눈먼 자, 가난한 자, 놀린 자-들에게 하나님의 통치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통해 열려 있다는 기쁜 소식이 팔복이 담고 있는 의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팔복은 우리의 가치관의 변화와 삶의 변화를 강하게 촉구합니다. 단지 예수님이 우리에게 들려준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사회적 통념들-성공, , 명예, 권력, 행복-에 대해 다시 한번 질문하게 합니다. 예수님 우리 삶의 실제적인 변화를 촉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산상수훈, 팔복을 단지 영적인, 천국의 삶의 모습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를 축소합니다.

 

나무는 그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나무입니다. 예수께 뿌리를 내린 나무가 세상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의 열매, 그분의 성품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 열매로 우리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를 통해 열매를 맺을 때 성육신이 되는 것입니다. 공중에 떠돌아 다니는 말씀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실제적인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입니다.  현실적으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까? 애통하는 자, 슬퍼하는 사람이 복이 있어 보이나요? 사람들은 슬픔을 복이라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애통함 그 자체는 슬픔의 표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말씀하십니다.

 

애통하는 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애통하는 자를 뜻하는 헬라어는 ‘penthein 펜쎄인입니다. 일반적으로 죽은 자을 위한 애통,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유진 퍼터슨은 이 의미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고 느끼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에야 너희는 가장 소중한 분의 품에 안길 수 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잃은 사람의 슬픔은 단지 우는 정도가 아닐 것입니다.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이고 깨어진 마음입니다. 몇 년 전에 이라크에서 폭탄 테러로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아빠의 울부짖는 사진을 본 적이 있습니다. 죽은 아이를 안고 우는 아빠의 찢어지는 슬픔입니다. 그 사진을 본 나도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때 찾아오는 슬픔입니다.  

 

그런 슬픔/애통함에도 복이 있는 것일까요? 인생이 늘 즐거운 것은 아닙니다. 사고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고통, 이해 할 수 없는 실패-사고, 죽음, 장애, 질병-..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에 고민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고통가운데 있는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은 슬픔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미를 찾고자 합니다.

 

최근에 있었던 일이기에 또 말합니다. 조이네와 함께 살던 조셉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너무나 큰 아픔이었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는 저에게도 큰 아픔이었지만, 조이 엄마아빠의 얼굴은 늘 눈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애통함입니다. 그런 애통함에 있는 복은 무엇일까요? 유진 피터슨의 번역에 의하면,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복입니다. 다시 말하면 슬퍼하는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품에 안겨 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엄마 품에 안겨 우는 아이처럼...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는가? 사람들은 슬픔과 고통 가운데서 경험을 통해 애통함이 주는 의미, 복을 찾았습니다. 중동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항상 햇빛만 있으면 사막이 된다.” 경험을 통해 얻은 지혜입니다. 고통/슬픔이 삶에서 가지고 있는 소중한 복을 발견한 것입니다.

 

예를들면, 밴쿠버 겨울은 비가 참 많이 옵니다. 와도 너무 많이 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햇빛을 좋아합니다. 비에 지친 사람들이 신에게 매일 햇빛만 달라고 기도하고, 신이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어서 365일 햇빛만 쨍쨍 내려 쬔다면 밴쿠버는 곧 사막으로 변할 것입니다. 인생도 그런 것 같습니다. 늘 기쁜 일만 일어난다면, 실패를 모르고 성공만 경험 한다면 그 사람은 삭막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해 할 수 없는 사막 같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국회 의원들이 싸우는 이유를 분석한 기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회의 엘리트들입니다. 일류대학을 나왔고, 늘 일등의 자리에 있었고, 성공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만 국회에 모였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나온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정상에 올라가 하나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만나는 곳은 정상이 아니라 가장 낮은 밑바닥입니다.

 

선인들이 말합니다. 실패를 통해서 사람은 성숙해 간다고. 다시 말하면 슬픔을 통해 우리는 삶의 의미를 다시 배우기도 합니다. 슬픔을 통해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기도 합니다. 슬픔을 통해 가족의 소중함을, 친구의 소중함을,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다시 발견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슬픔은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복이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슬픔/애통함은 인생에 단비입니다.

 

작년에 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졌을 때가 제게는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었습니다.하지만 저는 그 시간들을 통해 또 다른 선물을 받았습니다.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연약함이 가지고 있는 축복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환자 가족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의 슬픔, 애통함은 서로를 감싸고 안아주는 공동체를 이루게 했습니다. 연약함이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하나로 연결해 준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배웠습니다. 약함이/ 슬픔이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생각으로만 이해했던 것을 경험으로 배웠습니다.

  

그래서 수사들은 말합니다. “당신이 밑바닥까지 내려왔을 때, 그곳에서 하나님을 발견한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경험하는 슬픔, 나의 상처 때문에 우는 진실한 애통함은 복이 있습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전도서 저자도 삶에서 경험하는 애통함이 주는 복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고,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전도서7:1-4).

 

2. 자발적 선택으로의 애통함

 누가는 말합니다.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 임이요”-6:21b

 

애통하는 자의 다른 측면은 개인의 죄나 실수 혹은 사고로 인해 찾아 오는 슬픔/아픔이 아니라 자신의 자발적인 선택으로 인해 잠시 겪는 슬픔입니다. 이 애통함은 제자의 삶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이 땅에서 다른 선택을 하는 삶입니다. 성공의 넓은 길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는 삶입니다. 제자들이 선택하는 삶입니다. 세상의 영광이 아니라 세상이 보기에는 어리석게 보이는 좁은 길, 세상의 가치관과는 반대되는 삶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겪는 애통함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전부로 알고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법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서 세상이 보기에는 바보 같고 실패자 같지만, 하나님의 영원한 기쁨-하나님의 위로-를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3. 통회하고 자복하는 애통함

회개하는 애통입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서 우는 자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재물과 제사가 아니라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더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포장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나의 죄, 나의 연약함은 가능한 숨기고, 나의 가진 것을 자랑해야 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자신을 과대 포장해야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라는 단어는 이제 교회에서도 인기없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죄라는 의미가 법적인 의미로 제한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주어진 규칙과 법을 잘 지키면 의로운 사람인 것처럼 포장된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저도 죄에 대해서 부분적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을 죄인이라고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눈물/콧물을 흘리며 회개할 때 이해가 가지 않을 때가 많았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법을 잘 지켰고, 가능하면 작은 것이라도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심하게 욕해본 적도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때려본 적도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 것을 빼앗아 본 적은 더구나 없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제가 심각한 죄인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했었고, 오히려 저는 괜찮은 사람, 의로운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 제 안에 있는 깊은 욕망을 보게 되었습니다. 내 안에 숨겨져 있는 폭력성과 성적인 욕망과 돈에 대한 탐욕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돈에 대한 욕심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여전히 돈만 있으면 많은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저를 보았습니다. 요즘 자주 돈에 대해 생각하는 저를 봅니다. 숨겨져 있는 탐욕이었습니다. 요즘 처음으로 꾸미지 않은 나의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싶은 욕망이 찾아왔습니다.

 

저는 애통하고 싶습니다. 진정으로 나를 위해 울고 싶습니다. 그런데 눈물이 없습니다. 드라마를 보면서는 많이 우는데, 나의 어두움을 보고도 저는 울지 않고 있는 저를 봅니다. 때론 이런 저의 모습이 두렵기도 합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 진정으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자신의 어두움을 본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교만한 종교적인 사람보다 자신의 죄 때문에 울고 있는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수사들이 말합니다. “경건으로 교만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보다 죄로 통곡하는 죄인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서도 우리는 발견합니다. 바리새인은 당당합니다. 자신의 의를 자랑합니다. 하지만 세리는 하늘을 향해 머리를 들지 못하고 애통해 합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세리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세리의 통회하는 마음과 함께 계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합니다. “하나님은 통회하고 겸손한 자와 함께 있다고애통하는 자는 하나님과 멀어져 가는 자신을 보고 우는 자입니다. 고린도후서 7:10-11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애통함-은 회개를 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함으로써 여러분에게 얼마나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

 

죄로 인한 애통함은 삶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죄로 인한 애통하는 눈물은 부끄러움과 수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는 복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삶의 변화를 맛볼 것이며, 그로 인한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 안에서 웃게 되기 때문입니다.

 

진심으로 자신의 어두움을 보고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 어두움 안에서 빛 되신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애통하는 자는 단지 개인의 슬픔과 죄만을 표현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 애통하는 마음은 타인을 위해, 세상을 위해 갖은 마음입니다.

 

4. 그리스도인의 눈물로써의 애통함

 

이 애통함은 개인의 아픔과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의 표현이고 예수님의 사랑의 표현되는 애통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세상을 위해 우는 눈물입니다. 세상의 불의와 아픔을 가슴에 품고 우는 사람입니다. 대천덕 신부님은 늘 왼쪽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달고 사셨다고 합니다. 낙태로 죽어가는 수많은 생명을 위한 탄식이었습니다. 세상에 충만한 죄악을 보고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겪는 고통의 탄식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타인의 아픔을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아픔에 함께 동참하는 사람입니다.

 

시편 119:136절에서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사람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않으니 내 눈의 눈물이 시냇물처럼 흘러 내립니다. 에스겔 9:4절 후반부 -예루살렘-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역겨운 일 때문에 슬퍼하고 신음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법이 무너진 것을 보고 우는 사람, 억압과 압제로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보고 함께 울며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공의와 정의가 무너진 것에 대해 하나님의 진노의 메시지를 선포하던 선지자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빈궁한 사람들을 짓밟는 자들아, 저희 남편에게 마실 술을 가져 오라고 조르는 자들아, 주 하나님이 당신의 거룩하심을 두고 맹세하신다. 너희가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아라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살롬 공동체가 무너진 것을 보고 슬퍼하는 사람들의 애통함입니다.

 

이 애통하는 자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 땅에서 고통 당하고 버려진 자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이 땅에 우는 자와 압제 당하는 자와 버려진 자와, 죄인들이라 칭하는 자와 함께 하셨던 것처럼, 그들과 함께 울고 함께 하나님의 구원의 기쁨을 발견하는 사람들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이 땅의 연약한 자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미국 조지아에 있는 코이노니아 공동체를 시작한 클레렌스 조던 목사는 애통하는 자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꼭 눈물을 흘리는 자는 아니다. 애통하는 자는 깊은 혹은 진지한 관심, 염려(deep concern)’를 표현하는 사람이다. 만약 죽은 사람을 생각한다면 그는 울음으로 그의 슬픔을 표현할 것이다. 그는 또한 기도로 그의 슬픔을 표현할 것이다. 또는 다른 방법으로 그 슬픔을 표현할 것이다. 눈물이 애통하는 것의 본질은 아니다. 애통하는 것은 진지한, 혹은 깊은 관심이다.”

 

그는 이 애통함을 통해 하나님의 소명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클레렌스 조던는 학부에서 농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목회에 대한 소명을 발견하고 신학 공부를 합니다. 그는 신학박사를 마치고, 여러 교회와 신학교로부터 초빙을 받습니다. 그는 진로를 고민하는 중에 그가 어려서부터 보아왔던 인종차별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백인과 흑인들 사이에 있는 경제적 불평등과 증오에 대한 그의 진지한 관심과 염려는 그에게 보장된 안정적인 신학교 교수의 제의를 거절하고 조지아에 흑인들과 함께하는 코이노니아 농장을 시작합니다. 농학과 신학에 대한 지식을 결합하여 백인과 흑인이 함께 하는 초대 교회의 공동체 정신을 따라 코이노니아 농장을 시작합니다. 인종차별과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그의 깊은 애통함은 그로 하여금 다른 선택을 하게 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세상의 아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며 그 안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우는 자와 진정으로 함께 우는 사람입니다. 이 땅에 소외된 자, 하나님의 법이 무너진 것을 바라보고 우는 자,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바꾸어 가는 자입니다. 이들은 선지자와도 같은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탐욕과 폭력과 불공평함이 그들에게 너무나 큰 짐이 되어서, 세상과 타협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애통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소명을 발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 소명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애통하는 자는 개인의 회복뿐만 아니라 사회의 회복,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 우는 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이 주는 위로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이 애통하는 자는 또한 위로자가 될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여호와의 위로-구원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탄생 이야기에서 한 경건한 유대인 시므온을 만납니다. 시므온은 경건한 사람으로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던 사람입니다. 하늘로부터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은 타락한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사람입니다. 이는 단지 개인의 죄에 대해서만 애통해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구하는 애통함입니다.

 

누가는 시므온에 대해 성령이 임하여 그에게 계셨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성령의 인도와 지시를 받아 그가 기다리던 위로자, 메시아 예수를 봅니다. 애통하는 자는 여호와의 영,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위로를 찾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구원/회복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그는 성령의 지시로 이 땅에서 메시아 되는 예수를 보고 그와 함께 세상의 위로자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시므온은 그가 기다리던 위로, 메시아를 보았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위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아, 예수를 만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들은 복된 사람들입니다. 복된 우리에게 또한 주어진 소명이 있습니다. 

 

이 땅의 궁극적인 위로자 이신 예수님과 위로자로 살아가는 소명입니다. 시므온이 고대했던 위로는 단지 개인의 회복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회복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통치의 회복,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었습니다. 이는 단지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회복해야 하는 소명이 있습니다. 하나님 법-사랑-안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회복해야 하는 소명이 이미 복을 받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런 공동체는 어떠한 모습일까요?

 

위로로 번역된 헬라어는 parakalein-파라카레인통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용서를 경험하는 공동체입니다.

성경 주석학자 바클리에 의하면 헬라어 파라카레인’’은 자신의 죄로 인해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전적인 용서로 인한 위로를 뜻할 때 사용된다고 합니다.

통회하는 자의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오는 가득한 위로, 그 안에서 죄책감이 아니라 자유를 경험하는 위로입니다. 이는 깨어진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회복을 경험하게 하는 위로라고 합니다.

 

이러한 공동체는 하나님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죄를 고백하는 공동체입니다. 어렵고 힘든 모습이지만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용서뿐만 아니라 서로로부터 오는 용서를 경험하는 공동체입니다. 죄책감으로 부끄러워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용서로부터 오는 자유를 누리는 공동체입니다. 서로를 속박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에게 자신이 될 수 있는 자유를 주는 공동체입니다.

 

함께 하는 공동체는 다스리는 공동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울 때 우리의 담은 무너질 것입니다. 우리는 역설적으로 더 안전한 공간을 만들 것입니다. 서로의 연약함과 죄와 상처를 나눌 수 있는 그 안에서 용서와 회복을 경험할 수 있는 그래서 서로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더 하나로 세워져 가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2.    관계를 회복하는 공동체입니다.

헬라어 파라카레인는 연회에 초대할 때 상대방을 호칭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상대방을 동맹관계, 협력하는 사람, 혹은 조언자라고 부를 때 사용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위로를 받을 것이요의 뜻은 하나님은 단지 죄인이 다시 돌아올 때 수동적으로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다시 하나님의 동역자로, 협력자로 맞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이 모습은 아버지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둘째 아들을 맞아들이는 아버지의 사랑에서 발견됩니다. 그 아들의 신분을 완전하게 회복시켜준 아버지의 용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깨어진 관계가 다시 온전히 회복되는 공동체입니다. 서먹서먹한 관계로 슬퍼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친밀한 관계로 더 깊이 나아 갈 수 있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한 번 싸우면 헤어집니다. 용서를 해도 왠지 그 상처는 지울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용서는 상처를 기억하지 않고 친밀한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용서입니다. 애통하는 자들의 공동체,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공동체는 늘 친밀한 관계로 나아가는 공동체입니다.   

 

3.    서로를 격려하는 공동체입니다.

파라카레인용기를 북돋아주다, 격려하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다시금 우리에게 새로운 용기를 북돋아줍니다. 우리는 삶을 통해 이 사실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울 때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격려를 많이 경험했습니다. 위로하시는 하나님은 애통하는 자, 우는 자를 격려하시는 하나님이시고, 그들과 함께 계셔서 새 힘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이 위로를 통해 는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생각, 새로운 소명을 발견하게 합니다.

 

애통하는 자, 위로를 받은 자들의 공동체는 서로를 격려하는 공동체입니다. 서로 경쟁하고 질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서로의 손을 잡아 주고, 서로의 등을 밀어주며 용기를 북돋아 주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죄로, 연약함으로 쓰러진 지체를 멸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를 안아주고 세워줍니다.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서로의 손과 발이 되어 줍니다. 함께 사는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공동체는 타인의 약점을 가지고 비난하지도 판단하지도 안습니다. 오히려 그 약함을 내 안에서 발견하고 함께 울어줍니다. 그 함께 하는 슬픔 속에서 우리는 하나됨과 따뜻함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안에서 용서를 경험합니다. 용서를 통해 공허한 웃음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된 기쁨의 웃음을 우리 안에서 발견 될 것입니다.

 

4.    세상의 고통에서 소명을 발견하는 공동체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이 땅을 치유하고 회복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죽음의 승리를 부인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구원의 기쁨을 이 땅에서 회복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과 멀어져 가는 나의 자신과 세상을 발견한 사람은 단지 울고 있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과 함께 이 땅의 회복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함께 우는 공동체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소명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절망이 아니라 새로운 용기, 새로운 소명을 발견하고 함께 그 뜻을 이루어 가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아픔에 눈을 돌리는 사람, 세상의 아픔에 관심을 갖는 교회 공동체, 그들의 필요에 진정으로 반응하는 교회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아파하는 자들이 곧 나의 형제자매가 되고 우리의 가족이 되는 공동체는 가 될 것입니다.

 

정리합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잃고 우는 자와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우는 마리아와 마르다와 예수님은 함께 우셨습니다. 자신의 자로 인해 통회하는 자와 하나님은 함께 계십니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자신의 죄 때문에 통회했던 세리에게 하나님은 의로운 자라 인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시고, 메시아를 거절하는 그들을 보시고 애통해 하셨습니다. 죄악과 폭력으로 깨어진 세상을 보며 아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위로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우리를 이 땅에 울고 있는 자들에게 위로자로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라고 자만하는 교회 공동체가 아니라 나의 곤고함을 함께 고백하고, 나의 가난함을 함께 고백하며, 나의 죄 된 것을 함께 고백하며 애통해 하는 공동체, 세상의 아픔을 함께 애통해 하는 공동체, 그 안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발견하고, 세상의 우는 자에게 위로자로 살아가는 메시아적 공동체로 거듭나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