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 나라! 미래에 도래 할 나라 그러나 이미 도래 한 나라!

지나 두 주에 걸쳐, 지금 이곳에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누리고 있는 하나님이 약속 한 복의 현재성에 대해서 나눴습니다. 산산 수훈에 드러난 하나님 나라와 복은 단지 미래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나라이고 복이라고 말했습니다.

 

산상수훈은 단지 천국의 삶을 그리고 있지만은 않습니다. 산상수훈에 나와 있는특징들이 천국의 모습이라면, 예수님은 그 천국의 삶을 이 땅으로 끌고 내려 오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분은 그를 따라는 제자들에게 천국의 삶을 이곳에서 살 수 있는 길을 산상수훈에서 가르치고, 보여주고 있습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산상수훈이 예수님의 가르침의 본질이고, 팔복은 산상수훈의 중심이라고 말합니다. 성경학자 예레미아스는 산상수훈은 이미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 즉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그래서 산상수훈은 율법-윤리적 기준-이 아니라 복음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산상수훈을 그리스도인들이 삶으로 나타내는 믿음의 표현이고 삶의 열매입니다. 영국의 성경학자 존스토트는 팔복을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품어야 하는 성품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성령의 열매-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선과 온유와 절제-로 표현한 삶의 모습처럼, 팔복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이 땅에서 어떠한 사람들인지 그리고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팔복에 나와 있는 특징들은 우리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성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듭난 사람들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형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고 그러한 사람들에게 은혜의 선물로 주시는 복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팔복에 나와 있는 복들은 주로 경제적인 유익이 아닙니다. 그 복은 하나님의 임재-구원, 회복, 친밀한 관계-를 경험하는 은혜입니다.

 

오늘 말씀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를 사람들은 팔복의 중심이라고 말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고는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고는 그 어떠한 그리스도의 성품,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마태와 누가는 다르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심령이 가난하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기록하고, 누가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다른 두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아니면 마태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영적인 의미를 강조했고, 누가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사회적, 경제적 의미를 강조해서 각각 다르게 해석한 것일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히브리 단어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먼저 살펴 보아야합니다.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다 포함되었다는 것입니다. “가난으로 해석되는 히브리 단어, “anawin-아나윈경제적 가난과 심령이 가난한 상태를 동시에 표현할 때 상용됩니다. 존스토트는 구약에서 사용된 가난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가난하다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물질적으로 궁핍하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궁핍한 사람들은 하나님 외에는 피난처가 없기 때문에 점차 가난함은 영적인 의미를 함축하게 되었으며, 겸손하게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과 동일시 되었다.” 예를 들면, 시편 기자는 자신이 궁핍함에 처하여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는 자신을 이 곤고한 자 (this poor man)”라고 자주 표현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두 구절만 읽어 드리겠습니다. 시편 72:4 “저가 백성의 가난한 자를 신원하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 이사야 49:13그 고난 당한 자를 긍휼히 여길 것 임이니라.”

 

또 많은 성경의 구절들은 가난한 자들을 압제한 부자와 권력자들에 대한 심판의 말씀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 10:2, “빈핍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며 내 백성의 가련한 자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강한 자들 보다는 약한 자들을, 부한 자들보다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특별한 마음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하나님은 강한 자, 부한 자들이 사회에서 가져야 할 책임- 약하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정의, 공의 실천-을 바라셨습니다. 부자들이 그러한 부르심에 실패했을 때 하나님께서 직접 가난한 자들, 애통하는 자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구약에서는 가난한 자, 힘이 없는 자, 궁핍한 자는 부자와 권력자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사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만 구원해 주실 것을 기대하는 사람이었고, 또한 자신이 하나님께 주장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었습니다.

 

구약에서 가난하다는 말에는 물질적, 영적인두 의미가 다 포함된 표현이었습니다. 가난한 자는 그들의 어떤 도덕성 때문에 복이 있는 자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는 사람들이기에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사람임을 깨닫는 순간 그들은 마음이 가난한 자이고 그때 하나님의 임재를 그 가난함 가운데서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또한 가난한 자심령을 통회하며 떠는 자를 말합니다.

 

이사야 66 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높여주리니..” 킹 제임스 성경은 “even to him that is poor and of a contrite in spirit”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가난과 겸손/통회하는 마음을 긴밀하게 연결합니다.  

 

성경은 자주 부가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또한 성경은 가난그 자체가 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저는 가난한 아이들과 함께 삼 년 넘게 지냈었습니다. 가난 자체가 복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가난은 그들에게 고통이었고 아픔이었고 큰 상처였습니다. 가난 자체가 그들에게 복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난은 그들로 하여금 나쁜 길로 가는 유혹이 되곤 했었습니다. 그 아이들은 가난 때문에 받은 유익보다는 가난 때문에 받는 고통과 상처가 더 깊었습니다. 가난은 그들의 부모를 헤어지게 했고, 가난은 다른 아이들과 벽을 만들었습니다. 가난은 우리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이끄는 길은 될 수 있지만 모든 가난 그 자체가 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가난이 복입니까?

 

가난 자체가 복이 아니라 가난이 가지고 있는 특성-모두는 아니지만, 하나님께 더 가까이 이끄는 길, 통로가 되기 때문에 가난이 복입니다. 가난은 우리의 마음을 낮은 곳으로 이끌고, 하나님을 향해 구원의 손을 들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7 15절에서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겸손하고 통회하는 자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은 가난과 마음이 가난한 자 그리고 통회하는 심령을 하나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와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 다시 말하면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특별히 구분해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성경 저자들은 가난 자체에 의미를 두기 보다는 가난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에, 긍휼이 여기심에 더 마음을 두었습니다. 가난이 복이 되는 이유는 가난한 자, 연약한 자, 압제를 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부자들은 끊임없이 자주 주변 국가의 이교도들과 타협을 하는 경향을 보았고, 그 반대로 여호와께 계속적으로 신실했던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부는 세속성을 상징하고, 가난과 경건함은 동일시 하는 경향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존 스토트는 가난한 자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가난한 자는 어떠한 상황에 있던지 하나님께 그들의 믿음과 소망을 둔 경건한 사람들이다.”  

 

풀러 신학교 글렌 교수는 마태복음 5 3심령이 가난한 자를 구약의 의미를 살려서 이렇게 번역합니다. “Joyful are those who are poor and humble before God, ….” “하나님 앞에서 가난하고 겸손한 사람들로 번역합니다.

 

성경의 저자들은 가난과 겸손 그리고 통회하는 마음을 하나로 연결을 짓습니다. 가난한 자는 겸손한 자이고, 가난한 자는 통회하는 자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몇 가지 특성과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모여 이루어진 공동체의 특성을 나누고자 합니다.

 

1.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마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겸손은 우리가 너무나 많이 듣고 잘 알고 있는 단어입니다. 겸손은 예로부터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부와 명예에 열광하고, ‘-자아가 중심이 된현 시대에 사람들은 겸손을 무시합니다. 어쩌면 세상에서 겸손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겸손을 고리 따분한 옛 성현들의 가르침 정도로 이해 하거나, 더 심하게는 비굴함이나 자기 비하를 의미하는 부정적인 뜻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겸손-낮아짐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끄는 문입니다. 그렇다면 겸손은 무엇입니까?

 

A)   겸손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베네딕트 수도원은 경솜을 하나님을 경험하는 영적인 자질 중 가장 중요한 자질로 가르쳤습니다. 인간 (human)과 겸손 (humility)과 부식토(humus)는 같은 어원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즉 인간은 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은 흙에서 시작된 자신을 인정하는 데서 겸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완전한 신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것이 곧 겸손의 시작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겸손은 자신의 존재, 즉 인간다움을 솔직하게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흙으로 지어진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밝은 면뿐만 아니라 탐욕, 육체의 성욕, 어두운 면들을 직시하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용기가 겸손이고, 그 때에 우리는 참 하나님을 나의 어두움 속에서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많은 고행과 수련을 일상 생활로 하는 베네딕트 수도원은 수도승들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고행이나 밤샘이나 그 어떤 힘든 작업이 아니라 오직 솔직한 겸손만이 구원을 가져다 준다. 겸손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며 하나님께 합당한 자임을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표시이다.”

             

수도원은 끊임없이 강조합니다. “겸손은 진리에 대해 자신의 육체와 자신의 인간성을 받아들이는 용기이다.” 자신을 하나님께 잘 보이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포장하지 않은 용기가 바로 겸손이라는 것입니다.

 

영호네가 한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 토요일에 짐을 정리해 주러 갔었는데, 영호 엄마가 은영자매를 보며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가을이 엄마는 맨 얼굴로 만날 수 있는 몇몇 안 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여자들은 누군가를 만날 때 맨 얼굴보다는 화장을 하고 만나나 봅니다. 화장하지 않은 맨 얼굴로 누군가를 만날 수 있는 용기가 바로 겸손입니다. 누군가의 비난과 멸시까지도 받아 들일 수 있는 마음이 겸손입니다.

 

동료들한테 칭찬을 받은 한 수도승이 있었습니다. 많은 동료들이 스승 앞에서 그수도승을 칭찬 했습니다. 그러자 스승이 그를 데리고 시장으로 나와 그가 모욕을 견디어 내는지 시험해 보았습니다. 그가 모욕을 참아내지 못한다는 것을 안 스승은 말합니다. “겉은 아름답게 꾸며져 있지만 속은 도둑들이 난장판을 벌이고 있는 마을과 같은 사람이군.”

 

우리는 겉으로는 겸손을 꾸밀 수 있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겸손은 우리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포장되지 않은 겸손입니다.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상상되고 포장된 나의 겉 모습이 아니라, 자신의 연약함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사람이 곧 겸손한 사람이고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B)    겸손은 하나님 체험에 대한 응답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겸손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을 거듭난 사람, 성령을 체험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진실로 겸손해 질 수 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죄 때문에 타락한 나의 육체의 본질-연약함, 악함-을 발견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어두움 안에서 참 빛 되신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수록 우리는 더 낮아지고 겸손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선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겸손은 얼마나 내가 낮은 자인가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초점을 두도록 우리를 부릅니다. 겸손은 나를 하나님께 내어 드리는 행위입니다. 겸손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는 통로이고,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는 은혜입니다.

 

수도승들이 한 노부에게 겸손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가 대답합니다.겸손은 하나님의 위업이다. 겸손으로 가는 길은 이렇다. 1. 육체노동을 해야 한다. 2. 자기자신을 죄인으로 여겨야 한다. 3. 모든 이에게 굴복해야 한다.

한 수도승이 다시 물었습니다. ‘모든 이에게 굴복해야 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노부는 대답합니다. ‘모든 이에게 굴복해야 한다는 것은 다른 이의 결점에 마음을 쓰지 않고 오히려 더 자신의 결점을 관찰하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C)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것이 겸손입니다.

겸손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비교하지 않는 것입니다. 겸손은 타인의 잘못과 연약함에 대해 보다 더 자비함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겸손 한 사람은 형제와 자매를 멸시하지 않고, 그들 속에서 그리스도를 보는 사람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연약한 사람, 아픈 사람, 불완전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감싸 안아 주는 사람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수피의 전통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경건한 아이였고 밤이면 잠도 자지 않고 신앙과 금욕에 몰두했다. 그날 밤도 아버지와 나는 깨어 사랑하는 코란을 무릎에 얹고 앉아 있었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나는 말했다. “이 많은 사람들 중에 머리를 들거나 무릎을 끓는 자가 하나도 없다니, 모두 죽은 것같이 깊은 잠을 자고 있군요.” 그러자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애야,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느니 너도 저들처럼 잠을 자는 게 낫겠구나.”

 

겸손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도 않고, 판단 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의미해서 겸손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온유한 자이며, 관용을 갖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겸손을 하나님에 대해서만 아니라 사람들에 대해서도 가져야 하는 삶의 태도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에게 선택된 거룩하고 사랑받는 사람답게 자비로운 동정심, 친절, 겸손, 온유, 인내를 입으십시오 (골로새서3:12)”

 

정리하면, 겸손은 자신을 불완전한 존재로 인정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겸손은 하나님을 체험한 고백입니다. 이러한 겸손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겸손해 진다는 말은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지 않는다는 말이 됩니다. 겸손하다는 의미는 다른 사람에 대해 보다 더 관용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2.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의 무능력, 연약함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는 마태복음 5:3절을 벼랑 끝에 서 있는 너희는 복이 있다. 너희가 작아질수록 하나님과 그 분의 다스림은 커진다.”라고 해석합니다.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가 사극이나 영화에서 많이 보는 장면이 있습니다. 주인공이 적들에게 쫓기다가 벼랑 끝에 서 있는 장면입니다. 앞에는 적들이 있고, 뒤에는 벼랑 끝입니다. 그 순간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됩니다. 스스로는 어려움과 위기를 극복할 수 없는 상태,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만을 기다리는 상태입니다. 구원은 나로부터가 아니라 오직 밖으로부터 와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때 우리는 작아집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빈 손을 하나님께 들 수 밖에 없습니다. 나의 무능함을 고백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께 나 자신을 내어 드리는 은혜를 경험합니다. 수도사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넘어진 그곳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배신한 그곳에서 우리의 덕행으로 배울 수 없는 가르침을 받게 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무능함을 체험하게 되는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개방하게 된다.”

 

우리가 반복해서 쓰러지고, 반복해서 죄를 짓는 나 자신과 화해할 때, 그러한 나의 연약함, 나의 무능함을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다스림은 내 안에서 더 커져갑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내 안에서 더 커져 갈 때 우리에게 복이 있는 이유는 그 다스림이 내 안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데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저희들이 것임이요.”

 

하나님 나라는 개인적인 통치에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개인-심령이 가난한-과 개인을 연결해서 그리수도의 몸인 공동체를 이루어 갑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복이 있는 이유는 그들이 더불어 하나님 나라, 즉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데 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연약함을 또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장애를 가진 자녀들을 둔 부모들을 통해서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공동의 연약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장애를 가진 자녀를 둔 사실을 숨기는 사람들은 그러한 함께 하는 삶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오직 그들의 연약함을 인정할 때 그들은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제 조카 중 한 아이가 청각장애입니다. 그 조카가 어렸을 때 그 조카와 친구들을 중심으로 부모들이 함께 모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함께 자신들의 연약함을 나누고, 고통을 나누고, 함께 웃고, 함께 울며 서로를 격려하는 모습들을 보았습니다. 사회적으로 전혀 함께 하지 못할 것 같은 사람들-부한 자와 가난한 자들-이 자녀의 장애로 인해, 자신들의 연약함으로 인해 함께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가난한 자, 연약한 자들에게 복이 있는 이유는 그들 중심으로 진정한 공동체가 이루어 지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가진 것을 자랑하는 곳에서는 진정한 공동체가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배움이든, 물질이든, 성령의 은사든 무엇이든지 자랑이 되는 곳, 혹은 사람들, 자신이 남보다 더 낫다라고 말하는 곳에는 진정한 공동체가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오히려 연약함을 함께 나누는 곳에 진정한 공동체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의 말처럼, 공동체는 탤런트 쇼를 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제 밤에 우리 집에 함께 살던 토니-자폐청년-의 생일 파티에 갔었습니다. 지금 토니와 함께 살고 있는 가족이 토니를 알고 있는 친구들을 초대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잠깐이지만 연약한 자를 중심으로 모인 작은 공동체를 보았습니다. 서로를 자랑하지 않고, 서로를 안아주는 모습에서..

 

토니의 어머니가 고백했습니다. 전에는 토니가 부담이었고 짐어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토니가 나의 삶의 스승이라고. 토니를 통해 함께 가는 삶을 배웠고, 토니를 통해 천천히 가는 삶을 배웠고, 이웃을 볼 수 있는 삶을 배웠다고.

 

심령이 가난함, 연약함은 공동체를 세웁니다.

 

3.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모인 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아마 세상에서 보는 공동체와는 다른 모습일 것입니다. 세상은 늘 힘 있는 사람 중심으로, 권력을 가진 사람 중심으로, 돈 있는 사람 중심으로, 배운 사람 중심으로, 또는 강한 리더를 중심으로 모입니다. 세상에 있는 어떤 조직도 연약한 사람을 중심으로, 가난한 사람을 중심으로 모이는 곳은 없습니다. 심지어는 조폭들도 힘 있는 사람이 중심이고, 아이들조차도 힘있는 아이가 중심이 됩니다.

세상의 중심성에서 늘 힘과 돈, 권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심령이 가난한 자들로 이루어진 교회 공동체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공동체는 가난한 자, 연약한 자, 그리고 장애인들이 중심이 되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중심을 강함에서 약함, 부에서 가난으로 돌리렸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목마르고 배고픈 자는 복이 있나니…”

 

사도행전에 나와 있는 초대 교회에서도 이 사실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중심은 사도들이 아니었습니다. 교회의 중심에는 가난한 자들, 과부들, 연약한 자들이었습니다. 초대 교회가 진정한 성령의 코이노니아, 소유를 함께 공유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교회 공동체의 중심에 가난한 자들, 연약한 자들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모인 공동체는 그 중심을 -self”가 아니 타인 특별히 연약한 자들에게 둡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는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임금은 자기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할 것이다. 그 때에 의인들은 그에게 대답하기를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임금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할 것이다. (마태복음 25:35-40)

 

이 말씀을 기억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연약한 자, 가난한 자, 장애를 가진 자들에게 하는 것은 곧 예수님께 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자, 연약한 자들은 공동체의 주변이 아니라 중심에 있었습니다. 교회는 사도들 중심으로, 부한 자들의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들 안에 있는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성령의 이끄심에 순종했습니다. 교회의 중심은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는 그들 중에 있는 가장 작은 자, 연약한 자, 가난한 자들과 예수님을 동일시 하곤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늘 부자와 힘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모이려고 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아마 초대 교회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현상이 보였던 것 같습니다.

 

야고보 사도가 야고보서 2장에서 그러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교회를 강하게 질타합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 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읹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여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찌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케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 하셨느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가난한 자들, 연약한 자들이 교회의 주변으로 물러나기 시작하면 교회 공동체는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사람과 사람을 구별하는 악을 짓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 연약한 자들이 교회의 중심이 될 때 교회는 부한 자와 가난한 자가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부한 자들이 스스로 자신의 소유를 함께 나누게 될 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스스로 자신의 힘을 내려 놓고 섬기는 자가 될 것이며, 리더는 다스리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로 내려 오게 될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공동체는 약자들이 중심에 있는 공동체입니다. 사회도 약자들을 중심으로 정책을 만들 때 부한 자와 가난한 자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이룰 수 있습니다. 오래 된 사람들이 아니라 어쩌면 새로운 사람들을 중심으로, 연약한 아이들과 장애우들을 중심으로, 가난한 지체를 중심으로 교회가 모일 때 교회는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성령의 코이노니아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에게 임하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습니다. 연약한 자들을 중심이 된 공동체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머무시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기쁨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