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5: 3-12절


지난 주간 제 생각과 마음 속에서 계속적으로 떠오른 말씀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이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를 위하여 핍박 받는 사람, 이런 사람들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을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어쩌면 현실적이지도 못하고, 어리석게 보이는 이들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을까?

 

그렇다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복의 의미는 무엇인가? 세상에서 말하는 복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예수님이 산 위에서 말씀하실 때, 가까이에서 그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은 그들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복을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많은 사람들은 이 복을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예수님은 여덟 번을 반복해서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특별히 지난 수요일 밤에 있었던 한 사건은 저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신 에 대해 더 많은 질문을 하게 했습니다.

 

조이 엄마, 아빠와 함께 살고 있는 장애인 조셉이 수영하다 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조셉은 수영을 많이 좋아했고, 수영을 잘 했습니다. 조셉이 평상시에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곤 했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집에서 혹은 자다가 경기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날은 수영을 하던 도중에 물 속에서 경기를 하면서 의식을 잃었습니다. 라이프 가드가 건져서 인공호흡을 하고 응급실로 옮겼는데 6시간 만에 숨을 거뒀습니다.

 

중환자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눈물을 흘리며 아들을 살려달라고 기도하는 어머니와 조이 엄마, 아빠를 보면서,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를 보는 그 순간에도 제 마음 속에서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특히 의사로부터 조셉이 살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기대했던 의사들조차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던 그 순간, 오직 하나님 만을 찾을 수 밖에 없었던 그 순간이 어쩌면 저희들에게 심령이 가장 가난한 순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조셉은 결국 깨어나지 못하고 목요일 새벽 한시에 영원히 하나님 품에 안겼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신 복은 우리 안에 있었을까요? 우리는 그 충격적인 죽음 앞에서 정말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복을 누리고 있었을까요? 그 복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저는 묻고 또 물었습니다. “하나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 있다고 말씀하셨는데,그 복은 무엇입니까?” 의식이 없는 아들이 깨어나기를 바라는 저 어미의 마음에 찾아 오시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죽은 아들을 만지며 애통하는 어미에게 찾아 오시는 하나님의 복은 무엇입니까?

 

그 당시 우리들에게는 조셉이 깨어나고 다시 회복되는 것이 복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회복을 위해서 기도했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조셉은 죽음으로 우리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복을 받지 못한 것일까요? 

 

한 사람의 죽음은 많은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또한 모든 죽음은 모두에게 슬픔과 절망을 줍니다. 그 순간은 위로가 아니라 슬픔이 찾아옵니다. 말할 수 없는 절망과 탄식이 찾아옵니다. 때론 원망과 후회가 찾아옵니다. 그 순간은 어떠한 위로도, 어떠한 하나님의 임재도 없어 보입니다. 어떠한 하나님의 복도 누리지 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신 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복과는 달라 보입니다. 때론 우리가 이해 할 수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복에 대해서 극단적인 두 면을 선택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는 현실 세계가 아니라 저 넘어 세계에서 얻는 복입니다. 현실 세계는 변하지 않고 여전히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이 현실에서 고통을 잘 참으면 죽음 후에 받을 복을 강조하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에 대한 이해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착취와 불의에 대해 무관심해지고, 심지어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 불의에 순응하며 살도록 했으며, 하나님의 공의를 이 땅에서 이루는 것에 관심을 갖지 못하게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 지는 것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지난 주에 보았듯이 하나님 나라를 죽음 후에나 가는 천국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을 갖게 했습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착취와 불의마저도 저 세상에서 받게 될 복을 위해 인내해야 하는 시험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복에 대한 또 다른 극단적인 이해는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확실한 복-성공, , 권력 혹은 건강-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성공과 번영을 하나님의 복과 바로 연결하는 성향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우리의 하늘 아버지이십니다.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분이십니다. 다시 한번 묻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복은 무엇일까요?  

 

형제자매님 하나님께서 약속한 복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복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떠한 복을 받기를 원합니까?  예수께서 산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은 오늘 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유용한가요? 예수께서 말씀하신 과 청중들이 기대했던 은 같았을까요?

 

먼저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말씀하시던 당시 사회를 짧게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은 정치적으로 많이 불안했던 시대입니다. 밖으로는 로마의 통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로마에 대한 끊임없는 항쟁이 있었고, 안으로는 로마의 통치 아래서 로마의 힘을 업고 유대를 다스리던 왕과 로마 총독들의 횡포로 많은 백성들이 고통 가운데 있던 시기입니다. 폭력과 높은 세금은 사람들의 삶을 황폐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었던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올 메시아를 간절히 열망했습니다.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해 줄 메시아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여기 저기에서 메시아의 출현 소식이 들려오곤 했습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던 시기에도 여러 명의 메시아가 군중을 이끌고 로마에 항쟁을 했고, 열심당원들은 로마를 돕고 있는 유대의 높은 지위층 사람들을 표적으로 암살을 하곤 했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폭동이 일어나면 로마는 군대를 보내서 한 마을 전체, 아이들을 포함에서 모두를 죽이는 잔인한 보복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들의 반 로마 정서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반 로마 정서가 가장 강했던 시기가 예수님이 사역을 하던 시기였습니다.

 

민중들은 메시아를 갈망했습니다. 이런 기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이 광야에서 5천명을 먹이신 후에 사람들이 억지로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사람들에게는 그들을 배고픔을 해결해 주기 위해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이야 말로 그들이 갈망하던 메시아였습니다.

 

사람들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그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에 대한 갈망으로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도 예수님이 부활 하신 후에 제자들이 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라를 되찾아 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라고 여쭐만큼 이스라엘 민중에게 메시아에 대한 열망은 간절했습니다.

 

아마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 나온 무리들 중에는 메시아에 대한 열망, 민족의 구원에 대한 갈망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썩여 있었을 것입니다. 로마와 유대의 귀족들과 부자들에게 불의하게 핍박당하던 많은 민중들이 예수님께 나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유다도 열심당원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가 많은 무리를 선동하고 이끌어서 로마에 항쟁을 선포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로마로부터 독립을 이끌어줄 다윗과 같은 왕을 기대하는 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군중의 마음은 어쩌면 좋은 말씀보다는 로마를, 이스라엘 왕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예수로부터 듣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불안하고 혼란한 시대의 민중들은 한 사람의 말에 요동합니다. 그들의 갈망을 해결해 줄 수 있는 한 사람을 기다리고 기대합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땅과 부는 소수의 특권층의 소유였습니다. 오늘 날로 보면 몇몇의 대기업이 전세계의 부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부와 권력이 소수의 특권층에 집중된 사회와 나라는 언제나 불안정합니다. 요즘 은 선진국이라 불리는 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 그리고 한국에서는 묻지마 폭행과 살인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세상에 분노를 품은 사람들이 혹은 세상에서 소외되었다고 자포자기한 젊은 이들이 분노를 표출하는 한 사회적 현상이라고 합니다. 부가 일부에게 집중된 병든 사회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을 향해, 부자들을 향해 절망의 절규와도 같은 몸부림이기도 합니다.

 

이런 폭력적인 표출과는 다른 현상이지만 기성 세대에 실망하고, 더 이상 희망를찾을 수 없는 젊은 세대인 20-30대들에게 안철수 현상이라는 것이 생겼다고 합니다. 의사이면서도 컴퓨터 공학 박사이고, 사업을 통해 성공한 그가 또한 천억이라는 큰 돈을 사회에 환원한 안철수씨에게 현실의 고통과 절망으로부터 구원해 주기를 기대하는 현상입니다. 어쩌면 신기루 같은 현상이지만, 현실을 바꾸고 싶어하는 열망이 담긴 현상이기도 합니다. 한국의 20-30대 세대에게는 안철수씨는 메시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였습니다. 현실을 바꾸고 싶어하는,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열망이 예수님을 향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입을 바라봅니다.

 

예수님께 나온 무리들은 어떤 강한 메시지를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강해져라. 칼을 들어라, 때가 왔다. 로마를 무너뜨리고 이스라엘의 나라를 회복하자. 강해져라, 하나님의 구원의 때가 왔다.”

 

왜냐면 민족의 해방과 회복을 가장 강하게 갈망했던 갈릴리지역에서 예수께서 처음 외친 메세지가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였기 때문입니다. 이 한 구절만을 놓고 본다면 군중들이 예수님의 메시지를 오해할 만 합니다. 우리가 구약에서 보았던 것처럼, 이스라엘이 적의 침략이 있을 때 왕은 백성들 앞에서 옷을 찢으며 회개를 선포하고, 백성들이 겸비해서 회개를 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적의 침략에서 구원해주곤 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이스라엘 왕권의 회복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외친 메시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분명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속를 상상하게 했을 것입니다.

 

때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오해해서 따라다니곤 합니다. 자신의 기대에 맞게 예수를 만들고, 그 안에서 예수를 따라다닙니다. 그리고 그 기대가 깨어지면 뒤돌아 보지 않고 예수를 떠납니다. 많은 군중들의 기대입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후에 군중들이 다시 예수께 나온 이유는 그들이 더 많은 빵을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의 바램을 들어주지 않았을 때 그들은 모두 예수를 떠났습니다. 어쩌면 예수는 그 무리를 잡기 위해서는 그들이 기대하는 메시아가 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기대를 산산이 부수는 말씀으로 시작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핍박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세상에서 보기에는 전혀 복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누가는 누가복음 6장에서 한 발짝 더 나가 말합니다.

그러나 너희 부요한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 지금 웃는 사람들은 화가 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할 때는 너희에게 화가 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복 받은 사람들로 보이는 부요한 사람, 배부른 사람, 웃는 사람, 칭찬 받는 사람,”에게 화가 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분명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은 세상에서 말하는 복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한 복은 무엇일까요? 그 복은 언제 받는 것일까요? 그 복은 누가 받을 수 있나요?

 

우리는 마태가 예수께서 말씀하신 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헬라어 단어를 통해 그 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으로 번역되는 헬라어는 두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위로게오마카리오스입니다. ‘위로게오는 사람들에게 어떤 감동이나 행동을 촉구하는 희망적인 바램을 담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바라는 축복의 대상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해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를들면, “God bless you for all your hard work.‘ 일에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는 축복입니다.

 

반면에 마카리오스는 현재의 어떤 상태를 묘사할 때 사용합니다. , 지금 행복한 상태 혹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즐거움을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 미래적인 의미보다는 현재에 존재하고 경험하는 복을 묘사할 때 사용됩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이 사용한 단어는 마카리오스입니다. 영어 성경은 이 단어를 “Happy, blessed 그리고 joyful”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성경학자 Glen Stassen마카리오스‘joyful’로 번역합니다. 그 이유는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지금 구원의 일을 하시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금 이루고 계신 역사에 동참하는 기쁨을 맛보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주석학자 William Barclay는 팔복에 쓰여진 헬라어 문장에는 동사가 없기 때문에 팔복은 어떤 진술, 혹은 설명이라기 보다는 감탄사라고 말합니다. 시편에 나온 복 있는 사람은…”로 시작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Barclay는 말합니다. “팔복은 미래에 있는 행복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현재에 경험하는 기쁨에 대한 축하이다. 팔복은 다른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어나 것에 대한 진술과 예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여기에서 경험하게 될 복에 대한 확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복은 현재에 경험하는 지금 누리고 있는 기쁨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단어도 미래에 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보다 더 현재의 상태를 묘사할 때 더 많이 사용됩니다. 예수께서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셨을 때는 가난, 슬픔과 고통의 상황 속에서도 존재하는 실제적인 어떤 기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팔복에 묘사된 사람들-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핍박 받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은 현재 여기에서 그 복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미래에 대한 예언 혹은 사후에 있는 세계에서 있을 복에 대한 약속이라기 보다는 현재에 누리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선포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현재 경험하는 하나님의 구원/임재를 말합니다. 형제자매님은 이 복을 경험해 본적이 있을 것입니다.

 

팔복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미래적인 약속만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천국만 가면 되는 사람들이 중생한 사람들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삶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 고통과 눈물이 있는 이곳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기쁨을 맛보며, 그 구원의 일에 동참하는 자들입니다.

복이 있나니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일을 이곳에서 경험하도록 초대하는 선포입니다. 확실한 약속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이루시는 선포의 말입니다.

 

또한 산상수훈에 나온 복, 마카리오스는 나의 주관적인 느낌이나 상태를 말하는 행복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행복을 의미하는 영어단어 “happy”의 어근 “hap”‘chance, 기회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행복은 어떤 기회 혹은 변화에 따라 영향을 받습니다. 상황이 어려우면 행복은 느낄 수 없습니다. 대신에 좋은 기회를 얻었을 때 경험하는 행복, 혹은 나의 상황이 좋아졌을 때 느끼는 행복, 더 좋은 차를.. 더 좋은 집을.. 더 좋은 직장을.. 가졌을 때 찾아오는 행복과는 다른 의미입니다.

 

오히려 팔복에서 예수님이 말한 복, ‘마카리오스는 하나님과 삶을 함께 하는 나눔으로 얻는 기쁨입니다. 어떤 조건에 의해서 오는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로 말미암은 기쁨, 성령으로 변화된 나의 존재 자체가 기쁨이고 복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하나님의 찾아오심으로 인해 변화된 삶에서 맛보는 기쁨이고, 내 안에서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이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할 때 경험하는 하나님의 임재의 기쁨이고, 애통할 때 오시는 하나님의 위로의 기쁨, 마음이 청결할 때 만나는 하나님의 얼굴이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안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형상이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외적인 조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오히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존재인가를 말해주는 복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안에서 어떠한 존재입니까? 형제자매님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까? 하나님 안에 있는 자신의 존재가 여러분에게 기쁨입니까? 하나님 안에 있는 나의 형제자매를 보는 그 자체가 형제자매님께 기쁨이 됩니까?

 

하나님의 복을 세상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보아서는 안됩니다. 가난하면 실패한 삶이고, 성공하면 복 받은 자라는 이원론적인 사고를 우리는 버려야 합니다. 조건과 환경에 따라 느끼는 복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한 복; “마카리오스기쁨입니다. 네 안에 넘치도록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기쁨, 하나님의 임재로 말미암아 내 안에서 흐르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세상에서 볼 때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슬퍼하는 자가 복이 있고, 핍박 받는 자가 복이 있고, 배고픈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세상은 부유한 자, 성공한 자, 배부른 자, 행복한 자들에게 복이 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말한 복은 세상의 복과 너무나 다릅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한 예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 해 소출이 더 풍성하게 얻어 그 곡식을 저장할 창고를 하나 더 짓고 자신의 풍성함을 누리고, 즐거워하고 편하게 살자고 계획을 합니다. 세상에서 보기에는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합니다. “어리석은 자여예수님은 어떤 조건을 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예는, 성전에 기도하려 올라가 간 두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율법을 잘 지켜온 사람이었고, 십일조를 성실하게 이행했고,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당당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도 바리새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사람이고 더 많은 복을 받을 사람으로 보입니다. 바리새인에 비해서 세리는 저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을 향해서 고개도 들 수 없는 사람, 하나님을 향해서 입조차 열수 없는 죄인 세리,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아오고 멸시 받았던 세리를 향해 예수님은 하나님이 인정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외적으로는 바리새인이 복을 받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맛본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것을 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사람,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는 사람,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사는 사람을 복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 복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복은 외적인 변화-성공, -라기 보다는 우리의 마음과 관심을 더 하나님과 예수님께 이끄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과 예수님께 더 가까이 이끌리고 있다면 우리는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시편기자도 말합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이라고. 매일 주님께 가까이 가는 사람, 매일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무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형제자매님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기대합니다. “복이 있나니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된 우리 존재가 이미 복입니다. 예수님 존재가 이미 우리에게 복이었습니다. 이처럼, “복이 있나니의 외침은 우리 존재 자체가 이미 세상에 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진정한 복이 되기 위해서, 기쁨이 되기 위해서 존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복은 바로 하나님 나라이고 그 나라의 기쁨 소식을 나누는 것입니다. 복 받은 자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복이 되는 존재로 살아갑시다.

 

복이 있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