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6:33



금요일 밤에 가을이랑 봄이랑 함께 옛날 드라마 초원의 집을 보았습니다. 찰스의 가족을 중심으로 작은 도시 월럿 그로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소재로 한 가족 드라마입니다. 어른들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고, 찰스의 둘째 딸 로라의 눈으로 이야기를 풀어가서 그런지 가을이와 봄이가 좋아합니다.

 

월럿 그로브 작은 시골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 낯 선 사람의 방문으로 일어나는 사건, 마을의 중심이 되는 교회, 고통과 슬픔 그리고 기쁨을 함께 나누며 더불어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좋아 저도 이 드라마를 좋아합니다. 저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합니다. 가족의 의미, 교회가 마을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이유, 그리고 마을 공동체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의미에 대해서, 그리고 때론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갈등과 그 갈등을 마을 사람들-공동체-이 함께 풀어가는 화해의 과정을 보면서 나의 모습을 되돌아보기도 합니다.  

 

금요일에 보았던 한 장면은 요즘의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생각하게 했습니다.  찰스가 월럿 그로브의 대표로 농부들의 연합기구인 “Grain”의 컨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해 큰 도시 시카고로 갑니다. 시카고에는 찰스의 첫째 딸, 메리의 약혼자 존이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기에, 메리를 데리고 갑니다.

 

시카고에서의 마지막 밤에, 메리와 존이 함께 댄스파티에 갑니다. 메리는 너무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존과 함께 춤을 추면서 고백합니다. “I love you, John.” 하지만 존은 그 사랑의 고백을 들으면서 머뭇거립니다. 그리고 파트너가 바뀌면서 존은 다른 룸으로 급하게 갑니다. 그 방에서 그는 시카고에서 만난 다른 애인과 춤을 춥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메리의 마음과 고백은 하나님의 음성처럼, 그리고 존의 머뭇거림은 저의 모습처럼 보였습니다. 끊임없이 저를 향해 사랑을 고백하는 하나님, 여전히 설레임으로 나를 바라보시는 하나님, 함께 있는 것으로 만으로 행복한 하나님, 하지만 그 사랑에 다가가기를 머뭇거리는 나의 모습, 내 안에 다른 무엇이 있어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한, 다른 한 편에 하나님보다 더 좋은 그 무엇이 있을까 싶어.. 그 하나님의 사랑에 흠뻑 젖어 들기를 여전히 주저하고 있는 나의 삶을 보았습니다.

 

형제자매님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과 세상을 오가며 아찔한 줄타기를 하고 계십니까? 어떤 때는 하나님 편에서또 다른 태는 세상의 편에서..

 

오늘 읽은 마태복음 6:33절을 공동번역 성경은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를 구하라.” 이 말씀을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실체가 되시고, 하나님이 주도하시며,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삶에 흠뻑 젖어 살아라.”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실체가 되는 삶, 하나님 주도하시는 삶,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삶에 흠뻑 젖어 사는 삶 혹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지난 주에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 (임재)이라는 관점으로 산상수훈의 중요성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물지 않는다면 우리는 산상수훈에 나온 예수님의 삶을 따라 살 수 없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나라를 주제로 산상수훈을 보고자 합니다. 산상수훈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하나하나를 깊게 묵상하고 나누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는 산상수훈이 가지고 있는 전체적인 의미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산상수훈에 나타난 중요한 주제입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헤롯에게 잡힌 직후에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면서 이렇게 외칩니다. “너의 삶을 고쳐라. 하나님 나라가 여기 있다.” 이 선포는 세례 요한의 메시지 이기도 했습니다. 4 23절에도 예수님의 사역을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회당을 집회 장소로 삼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셨다. 하나님 나라가 그분의 주제였다. 바로, 지금, 그들이 하나님의 선한 통치 아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질병과 잘못된 생활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고쳐주셨다.” 표준 새번역은 예수께서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며,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백성 가운데서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 주셨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주제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 안에서 드러나 실체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사셨던 나라였고,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나라입니다. 이 나라의 새로운 삶이 바로 산상수훈의 중심입니다.

 

이런 예수의 소문은 온 시리아에 퍼졌습니다. 많은 병든 사람들이 예수께 왔고, 예수님은 그들을 고쳐주었습니다. 그리하여 갈릴리와 데가보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으로부터 많은 무리가 예수를 따라왔습니다. 예수님은 큰 무리가 그를 따라 오는 것을 보시고 산에 올라 갔습니다. 않으셔서 입을 열어 가르치십니다. 이 가르침은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과 한 선상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주제였던,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산상수훈은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삶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 하는 삶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워가는 관계, 공동체의 삶을 산상수훈은 그리고 있습니다.

 

5 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0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2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610나라이 임하옵시며” 6 33, “그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 7 21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위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 나라는 선물로 주어지는 것 같아 보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선물로 받고, 그 나라에 들어가고, 그 나라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이미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자주 하나님 나라를 천국 즉 사후에 가는 나라로 많이 가르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후에 주어지는 나라일까요? 현재 우리가 살고 이 시대에는 맛 볼 수 없는 나라일까요? 만약 하나님 나라가 사후의 세계를 말한다면 예수님은 왜 하나님 나라가 여기 있다라고 가르쳤을까요? 영국의 성공회 신학자 톰 라이트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의 설교에서 나오는 하나님 나라는 사후의 운명을 일컫는 말도 아니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벗어나 다른 세상으로 가는 것을 의미하는 말도 아니다. 이것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임하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일컫는 말이다.”

 

만약에 하나님 나라가 단지 사후의 세계를 말한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개입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왕으로, 통치자로 있을 이유가 없었고, 그들에게 십계명을 주어야 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죄를 범했을 때, 그들을 심판해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난한 자를 압제하고, 과부의 재산을 빼앗고, 거짓 추를 사용해서 약자를 속일 때 하나님은 노하시고 그들을 벌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다른 나라처럼 왕을 요구할 때도 슬퍼할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계속적으로 이스라엘의 삶에 간섭하셨고,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기를 바라셨고, 그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고, 그분의 다스림 아래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지금 이 시대에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백성이 사후에 가는 나라가 아니라, 그의 백성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드러내고, 온 민족이 그분의 통치 안으로 들어오시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 나라가 우리가 죽어서 가는 나라라면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간섭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사후에 있는 세계라면 우리에게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할 법을 주실 필요가 있습니까?

 

마태, 마가, 누가 복음에서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의 가장 큰 주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그 소식은 단지 사후의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지금 이곳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나타나고, 하나님의 구원과 치유가 지금 이곳에서 이루어 지고 있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복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맛 볼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 복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현재에도 이루어 지는 나라입니다.

 

유진 피터슨의 번역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벼랑 끝에 서 있는 너희는 복이 있다. 너희가 작아질수록 하나님과 그분의 다스림은 커진다.” 6 10절을 하나님 나라가 임하시고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세상을 바로 잡아 주시고하나님 통치가 지금 이곳에서 이루어 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질문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무엇인가? 어떻게 그 통치를 인식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형제자매님은 하나님 나라, 하나님 통치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나요? (대답할 시간이 필요)

 

제가 중학교 때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알았었더라면 (그 당시는 천국만 알고 있었음), 제게 하나님 나라는 평화의 나라였을 것입니다. 중학교 때 저의 가장 큰 기도는 평화였습니다. 형제자매님이 아시는 것처럼, 저의 두 형님은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중학교 때, 작은 형은 20십대 초반의 젊은이였습니다. 형은 성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성욕의 본능은 그를 괴롭혔고, 형은 어떻게 통제할지 몰라, 동네의 작은 여자 아이들을 괴롭혔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성폭행은 아니고 성추행 정도입니다. 아이의 엄마가 찾아오는 밤이면, 아버지는 화를 참지 못하고 작은 형을 때리려고 합니다. 기억해보면 아버지는 작은 형을 때린 적은 없습니다. 단지 겁을 주었을 뿐입니다. 작대기를 들고 죽이네 살리네 소리치면 작은 형은 겁을 먹고 도망을 치고, 아버지는 화를 못 이겨 소리 치시고, 저는 화내는 아버지를 붙잡고어머니는 말 없이 뒤에서 쳐다보시고 그 밤은 막말로 하면 지옥이었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돌아올 때마다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작은 형이 일치지 않고 오늘 밤은 무사히 넘기게 하소서.” 제 기억으로는 한 일년 정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 때 저에게 구원은 내적 평화가 아니라 가정의 평화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평화의 나라였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저의 경험이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며 더불어 평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저에게 하나님 나라의 이미지를 말하라고 한다면, “샬롬-번역하면 평화와 정의입니다. 제가 자주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저는 샬롬의 관점으로 성경을 자주 읽습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샬롬-평화라는 관점을 가지고 성경을 많이 묵상합니다. 저는 샬롬이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샬롬은 여러 번 말했던 것처럼, 단지 내적인 평화 혹은 정의를 말하지 않습니다. 샬롬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관계를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에게 하나님 나라는 다른 사람들과의 올바른 그리고 조화로운 관계에서 살아가는 삶, 공동체입니다. 단지 표면적인 관계가 아니라 샬롬 안으로 들어가는 구체적인 깊은 관계를 말합니다. 저는 이런 부분에 있어서 많이 약합니다. 또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일반적으로 말할 때 통치 행위는 정지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 역동적이고 실제적인 행위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다스림은 단지 추상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이며 역동적인 하나님의 어떤 행위입니다.

 

나라를 국어 사전에서 찾아보면, 일정한 영토거기사는 사람들구성되고, 주권(主權)의한 하나통치 조직가지고 있는 사회 집단, 또는 (일부 명사함께 쓰여) 단어나타내는 사물세상이나 세계이르는 . 예를 들면, 동화나라, 과일나라등 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통치와 나라라는 혼자/개인을 말하지 않습니다. 사회적 혹은 관계적인 의미를 내포합니다.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통치는 사회적입니다. 단지 개인의 마음을 다스리는 어떤 것이 아니라, 관계 안에서 들어나는 구체적인 행위입니다. 하나님 나라라고 하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은 백성들로 구성된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실천 되어지는 나라이고, 그 나라에는 왕과 백성들의 관계가 있고, 백성과 백성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그 나라와 다른 나라와의 관계를 형성됩니다.

 

다시 한번 십계명을 예로 듭니다. 십계명은 하나님 백성-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기준이 되는 법으로 우리의 삶에 중요합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법입니다. 그 법 안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리고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가 구체적으로 들어나 있습니다. 그 관계는 상호의존성을 가집니다. 십계명은 한 개인의 도도한 윤리적인 삶을 살라고 준 것이 아니라, 서로의 관계 안에서 살롬의 공동체를 이루도록 준 하나님의 법입니다.

 

하나님은 그이 백성들에게 그 이웃 나라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니라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너희는 내 법도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18:2-4).

 

마태복음 68절에도 나옵니다. “그들을 본받지 말고하나님 나라는 세상과는 아주 다른 나라입니다. 신기하게도 세상에 살고 있지만, 다른 이웃들과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주위 사람들을 본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다르다라고 말합니다.

 

개그 콘서트에 이런 코너가 있습니다. 한 가게에 전에 물건을 사간 고객이 그 물건을 바꾸러 와서 점원과 대화를 하는 상황입니다. 물건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면서, 이것은 달라도 너~~~무 달라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있는 공동체를 보았을 때 이런 말을 해야 되지 않을까요? 저들은 달라도 너~~~~~무 달라. 세상 사람들이 저들도 우리와 똑 같다라고 말한다면, 교회 공동체에게는 가장 수치스러운 말이 될 것입니다. 

 

셜브륵 교회 공동체는 달라도, ~~~~무 달라..” 그래야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우리를 통해 빛으로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른 모습은 어디에서 발견될 수 있을까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세상 속에서 다른 생활 양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에서 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삶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존스토 목사는 말합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이 기대하시는 그의 제자들, 곧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이 취해야 할 행동을 묘사한다.” The upside-down kingdom”를 쓴 도널드 크레이빌은 산상수훈은 하나님 나라의 삶을 묘사하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산상수훈은 단지 영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실제의 삶에서 살아가야 하는 나라이고 삶입니다. 즉 산상수훈을 따라 살아가는 대안적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지난 몇 년 간의 저희 교회를 되돌아보았습니다. 샬롬의 관점 그리고 관계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살아왔는가?

 

아쉬운 점은 우리가 아직 비전을 못 만든 것도, 멤버쉽을 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을 더 풍성하게 나누지 못한 것이었고,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더 많이 사랑하지 못 한 것이었습니다. 한 지체가 힘든 일이 있을 때 안전하고 또 더 자유롭게 그 아픔을 나눌 수 있는 몸이 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샬롬은 많이 이야기 했지만 나의, 우리의 실제의 삶에서 그러한 삶을 나누지 못한 연약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겐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의 왕 되신 하나님, 그리고 그분의 다스림을 실제적으로 이 땅에 나타내 주신 예수님의 호흡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우리는 목표에 도달한 사람들이 아니고 그 과정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곳에 임하기를 바라는 소망이 있는 우리는 그 나라를 살아갈 것입니다.

 

결혼에도, 그리고 모든 공동체가 겪는 공통된 경험들이 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환상기입니다. 서로에 대한 환상, 결혼에 대한 환상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환상.. 그렇게 시작한 삶은 시간이 지나면서 환멸기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환상이 깨지면서 현실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 하는 것은, 환멸기라 불리는 이 시간이 서로를 더 깊이 알아 갈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이 시간은 헤어지고 갈라지는 시간이 아니라, 서로의 약함을 통해 서로를 더 깊이 알아가는 시기라고 합니다. 서로의 아픔을 통해 서로 안으로 더 깊이 들어 가 서로에 대한 신뢰를 쌓아가는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그 다음은 안정기입니다.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와 사랑이 쌓인 시기입니다. 서로에 대한 풍성한 사랑과 더불어 사는 삶의 참 기쁨을 맛보는 시기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이 어쩌면 환멸기의 중간지점에 와 있는지도 모릅니다. 서로에 대해서 약간의 지침도 있고, 교회에 대한 실망도 있고, 그러나 이 시간을 통해 우리는 더 깊은 신뢰와 사랑으로 성숙해 갈 수 있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사, 우리도 다시금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회복하고, 그 나라의 삶을 경험하고 살아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산상수훈을 함께 묵상하고 나눌 때에 이런 회복들이 일어나기를 기대합니다. 우리 안에 실제적인 하나님 나라의 삶의 모습들이 회복되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