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1-2절

주제: 하나님 임재 안으로..

 

지난 주까지 우리는 더불어 여행이라는 주제로 아나뱁티스트-메노나이트 관점에서 창조, 구원, 성령, 교회, 그리고 영적훈련에 관해서 함께 나눴습니다. 여행의 시리즈를 통해서 우리는 아나뱁티스트-메노나이트가 어떻게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또 무엇을 강조하며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로 살아왔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성경을 보고, 이해하고, 살아왔던 사람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자신들의 삶이 되고자 그 말씀에 순종했던 사람들, 그리고 살아계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고 신실하게 살아왔던 그들의 발 자취를 따라 걸으며 성경을 묵상했습니다.  

 

오늘부터는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중심이 되고, 본질이 되는 산상수훈-Jesus’ teachings on the Mount”을 함께 묵상하고 나눌 것입니다. William Barclay는 산상수훈을 그리스도인의 삶과 신앙에 본질이고, 중심이라고 말했습니다. 특별히 아나뱁티스트-메노나이트에게 있어서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순종하고, 따라야 할 예수님의 삶이었고, 거듭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성령의 임재를 드러내는 삶으로 이해했습니다. 마태는 마태복음 5,6,7장에 산상수훈을 기록하고 있고, 누가는 누가복음 6장에 평지설교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모든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삶의 중심되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고, 불편함 없이 읽어 왔던 산상수훈은 역사적으로 교회와 신학에 많은 도전을 주었습니다. 읽기가 참 불편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너무나 높은, 인간으로써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윤리적 이상을 담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참 좋은 말씀이구나 생각은하지만 우리가 따르기는 불가능한 말씀이라고 단념하든지, 혹은 우리가 아주 좋아하는 팔복 (Beatitudes)만을 강조하던지, 때론 우리가 따를 수 있다고 생각 되는 부분만을 골라 우리 삶에 적용하는 경향이 우리들을 포함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습니다. 이런 경향은 현재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 깊은 뿌리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시기에 형성된 신학의 영향입니다.

 

교회 역사에서 산상수훈을 읽으면서 가장 괴로웠던 시대는 국가권력과 교회가 하나가 되는 시기인 4세기의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교회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국가의 중심이 되면서, 세상의 권력과 교회가 타협을 하면서부터 교회 지도자, 신학자들과 권력자들은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읽을 때마다 많이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민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의 불편함을 해소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국가와 교회가 싸우지 않고 서로 상부상조하며 함께 갈 수 있을까? 국가는 교회를 이용해서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원했고, 교회는 국가의 힘을 빌려 그들의 안전을 지키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국가와 교회는 산상수훈을 피해가면서도 예수님을 예배 할 수 있는 안전한 우회로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형제자매님은 안전한 우회로를 찾기 위해 노력해 본적이 없으신가요? 하나님이 말씀을 읽을 때 마음이 불편합니다. 마음에 도전이 옵니다. 그래서 그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타협을 찾으려고 노력해 본적은 없는지요? 하나님은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세상과 잘 타협하고 살 수 있는 좋은 우회로, 방법들을 찾아 헤매보진 않았습니까?

 

제가 아는 한 목사님이 토론토에 있는 한 큰 교회에서 세금에 대한 설교를 한 적이 있는데, 그 설교 후에 장로님들이 찾아 와서 말했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세상을 잘 몰라서 그럽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세상을 살아갑니까? 세금을 정직하게 납부하라는 것은 우리보고 다 목사가 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때론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산상수훈은 더욱 그렇게 느껴집니다. “오른쪽 뺨을 맞으면 왼쪽 뺨도 대라바보가 아니라면 누가 맞고 가만히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왼쪽 뺨까지하지만 우리가 늘 기억해야 할 진리는 예수님도 세상에서 바보처럼 사셨다는 것입니다. 많은 이적과 기적 그리고 따르는 수 많은 사람들로부터 어떠한 권리도 이익도 취하지 않으시고, 찾아오는 그들에게 당신의 모두를 주셨던 바보, 사람들이 욕하고 비난해도 세리와 창녀 그리고 병든 자들을 포기하지 않고 찾아가신 바보 예수, 그분이 우리가 사랑하고 따르는 우리의 주님,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따를 수 있는 것이 바보가 되는 것이라면 나는 세상 물정에 밝아 예수님을 멀리하는 지혜로운 사람보다는 행복한 바보가 되는 길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형제자매님은 어떠신가요?

 

다시 4세기 교회의 현실로 돌아갑니다. 4세기는 교회의 역사에서 중요한 변화가있었던 시기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로 개종한 후, 교회는 로마의 국교가 됩니다. 오랫동안 핍박을 받아왔던 교회가 로마의 국교가 된 것은 교회의 승리처럼 보입니다. 국교가 된 후 교회는 놀랍게 성장하고, 막대한 권력과 부를 소유하기 시작합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성공적입니다. 더 이상 가난한 자들의, 혹은 소외된 자들과 약자들의 교회가 아니라, 권력과 부를 가진 자들이 중심이 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오늘 날 많은 교회가 꿈꾸는 그러한 교회가 됩니다. 겉으로는 부하고, 겉으로는 화려해지고, 겉으로는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겉으로는 세상을 이긴 것처럼 보이는 교회가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와 신학자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불편한 사실들을 발견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성경에서 읽을 때마다 많이 불편합니다. 그 중에서도 산상수훈은 성경에서 떼어 내고 싶은 부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부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의 권력자와 부한 자들이 중심이 된 교회에서, 예수님의 가르침-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핍박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원수를 사랑하라너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네 왼 뺨을 치거든 오른쪽도 대라…-를 들었을 때 마음이 편했을까요? 감동을 받았을까요? 순종하고 싶었을까요?

 

가난한 자들의 친구로 살으셨던 예수님, 그리고 당시에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사두개인과, 종교 지도자들과 대립되었던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이 4세기 교회와 권력자들에게 많이 불편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부인할 수도 없었고 제거해 버릴 수도 없는 예수님의 가르침, 그래서 많이 고민합니다.

 

그 결과, 교회와 신학자들은 그들의 상황에 맞게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재해석하고, 그리고 일부는 아주 교묘하게 제거합니다. 아주 난처하고, 교회에서 특별히 일반 군중들 앞에서 읽고 싶지 않은 산상수훈을 재해석하기 시작합니다. 아주 그럴싸하게. 아주 편한 우회로를 발견합니다.

 

예를들면, 이 산상수훈은 성직자나 수도사에게 주어진 명령이며 일반 그리스도인들은 실천할 수 없는 것이다. 또는 이 산상수훈은 지금 시대를 위한 말씀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표현한 것이다. 이 말씀은 개인의 내적인 삶에 적용되는 것이지 공적인, 외적인 삶과 행동과는 무관하다. 이 가르침은 우리가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앞으로 더 가까이 가도록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해석은 사람들-특별히 교회 안에 있는 권력자들과 부자들-에게 편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고, 사람들로 하여금 산상수훈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안전하게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안정장치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오늘 날의 교회 현실은 어떻습니까? 아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은 하되, 가능하면 쉬운 말씀쉬지 말고 기도해라,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기뻐하라-에 집중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나에게 좋은 말씀을 찾아서 외우고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는 권력자와 부한 자들에게 매력적이 되기 위해 더 편안한 공간과 더 나은 프로그램 그리고 쉬운 (편한)복음만을 강조하고 가르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선교와 구제 그리고 교회 프로그램의 성공을 위해 진정 예수님은 잃어버리고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 우리에게 편한 부분만 선택하려고 하는 순간 우리는 세상과 타협하는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인 동시에 우리를 아주 불편하게 만드는 소식입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인 동시에 우리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소식입니다.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복음은 또한 한 개인에게 선포된 것인 동시에 교회 공동체에도 선포된 것입니다.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삶을 새롭게 형성하도록 선포된 것입니다. 복음은 구원이며 동시에 도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산상수훈의 가르침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산 것은 아닙니다. 그 시대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은 살아 역사하셨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았던 남아 있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Francis of Assisi-성 프란시스입니다. 그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을 들었을 때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납니다. 그는 전적으로 예수님의 가르침, 특별히 산상수훈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의 삶은 많은 또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전을 주었고, 영향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며 살았던 신실한 제자들은 산상수훈을 단지 이상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서 따라야 하는 예수님의 삶이고 가르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16세기 종교 개혁이 당시 또 다른 한 무리가 나타납니다, 바로 아나벱티스트들입니다. 이들은 산상수훈을 예수님의 핵심 가르침으로 이해했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교회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으로 산상수훈이 단지 사제들과 수도사들을 위한 말씀도 아니고, 또 단지 사후에 있을 하늘 나라에 삶에만 적용되는 말씀도 아니고, 지금 이곳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살아야 하는 삶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들은 산상수훈을 단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도덕적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산상수훈에 순종하며 살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그 말씀은 우리 안에서 일하신다는 믿음이었습니다. 나의 노력으로 이룰 수 없지만, 그 말씀 안에서 나를 부인할 때 자신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님이 그 말씀에 따라 살 수 있도록 인도하고 도우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즉 성령이 내주 하셔서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삶으로 드러난다고 믿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그들은 산상수훈에 나타난 삶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표시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따르고 싶은 말씀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모든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강조했습니다.

 

오늘부터 묵상하기 시작한 산상수훈은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산상수훈은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높은 도적적 이상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말씀이고, 하나님 임재 안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열매입니다.

 

오늘 마태복음 5:1-2, 두 구절에 나타난 산으로 오르셔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모습에서 마태의 숨겨진 의도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다라는 묘사를 통해 그의 독자들을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초대합니다.

 

마태는 그가 쓴 복음서의 많은 부분을 구약에서 인용합니다. 그는 유대인을 대상으로 복음서를 썼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구약의 많은 부분 특별히 모세와 선지자 이사야의 글들을 많이 인용합니다.  

 

마태복음 1-4장에서도 이러한 마태의 의도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마태는 그의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삶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을 계속적으로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서,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를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함이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28장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20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태복음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흐르는 한 주제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임재로 인해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삶의 많은 변화와 치유, 회복 그리고 은혜에 대해서 마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마리아와 요셉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3장에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도 하나님의 임재를 봅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나님의 임재는 마태 복음의 큰 주제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마태복음 4장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방해하는 한 세력을 만납니다. 바로 사탄입니다. 사탄의 가장 큰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사탄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가지고 시험합니다. 배고픈 자들에게 먹거리는 아주 중요합니다. 아니 우리들 모두에게 먹을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생명을 지켜가는 데 필수입니다. 우리는 이 먹거리를 더 갖기 위해 경쟁하고, 전쟁하고 싸우고 살아왔습니다. 사탄은 자꾸만 우리의 탐욕을 부추깁니다. 그래서 나만, 우리만을 보게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자꾸만 우리는 멀어집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두 번째 시험은 불신입니다. 불신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자꾸 의심하게 하고, 시험하게 합니다. 기드온도 하나님을 불신했기 때문에 세 번이나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우리에게 나타난 분이 정말 하나님인지? 우리의 삶에도 이런 불신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어떤 기적을 바랄 때 우리는 더욱 그렇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계신 것인지.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언제나 신뢰하도록 초대합니다.

 

세 번째는 권력입니다. 권력을 네게 줄 때니까 하나님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부와 권력을 가져라 그 대신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부와 권력이 아니라 하나님 안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끊임없는 초대는 하나님 임재 안으로, 그리고 그 안에서 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우리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 아가야 할 수많은 현실적인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타협하고, 포기하고 때론 포장하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형제자매님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사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먹거리입니까? 불신입니까? 아니면 권력에 대한 욕심입니까? 아니면 게으름입니까?

 

마태는 사탄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아가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도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살아갈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산에 올라가 앉으셔서 입을 열어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행동을 통해 우리들을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초대합니다.

 

마태는 그이 독자인 유대인들과 우리들의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51절입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누가는 이 말씀을 예수님이 평지에서 가르쳤다라고 기록합니다. 왜 마태은 예수님이 자주 가신 갈릴리 바닷가에 앉아서가 아니라, “산으로 올라가라는 말을 썼을까요?

 

산으로 오르다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에게 떠 오르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모세입니다. 마태는 예수님 탄생 이야기와 광야에서의 시험 이야기에서도 모세의 탄생과 광야에서 40년을 지낸 모세의 이야기와 연결합니다.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는 행동도 모세가 시내산에 올랐던 이야기를 연상하게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홀로 산에 오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에 들어가기 위해 산에 오릅니다. 모세는 산 위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십계명을 받았고, 그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성경에서 산에 오르다라는 의미는 자주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나아가는 혹은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간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에 오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혼자가 아니라 제자들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산에 오릅니다. 모세와 다르게 예수님은 혼자가 아니라, 그의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산상수훈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고 그 안에 머무는 삶은 어떤 삶일까요?

 

우리가 누군가의 안으로 들어간 다는 말은 자유를 의미할까요? 아니면 속박을 말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당신 안으로 초대합니다. 속박일까요? 구원일까요?

 

누군가의 밑으로 들어가는 것은 대부분 속박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는 자유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율법 아래, 율법의 노예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권력 아래로가 아니라 그분의 사랑 안으로 초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통치 아래로가 아니라 그분의 통치 안으로, 즉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우리를 부르셨씁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임재 안에서 산상수훈을 제자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십계명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신 이유가 그들을 그 법안에 속박하기 위함이었을까요? 아니면 그 법 안에서 살아가는 자유를 위한 것이었을까요?

 

십계명의 맨 처음은 이렇게 나는 너희를 이집트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 땅 종살이에서 구원하신 분이십니다. 즉 그들을 노예로부터 구원해서 자유를 주신 분이십니다. 속박이 아니라 자유를 주기 위해 부르신 하나님이 주신 계명은 사람들에게 속박이 아니라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살인하지 못한다-폭력으로부터 구원입니다, 간음하지 못한다-사회적으로 연약한 사람들, 특별히 아내와 여자들을 남편 혹은 남자의 폭력으로부터 구원입니다. 너희 이웃에 거짓 증언하지 말라-불의로부터 구원이고, 탐욕으로부터 자유입니다. 안식일은 일 중독 그리고 착취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안식년, 희년은 영구적인 가난과 빚으로부터 구원이고 자유입니다. 십계명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의 속박으로부터 구원하고,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주기 위한 하나님의 법이고, 또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냅니다.

 

십계명을 통해 본 하나님의 임재의 특징은 또한 관계의 회복과 확장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십계명은 단지 한 개인의 도덕적 삶을 말하지 않습니다. 공동체의 안에서의 올바른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은 관계를 올바로 세워가도록 주신 법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가족 안에서 자녀와 부모와의 관계를, 사도바울은 이 관계를 확장해서,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까지 말합니다. 그리고 이웃과 관계를, 더 나아가 사회에서 가장 소외층이었던 종들과의 정의로운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샬롬-평화의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말씀에 따라 산다면 말입니다.

 

십계명에서 본 하나님의 임재의 특징은 자유와 구원,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올바른 관계의 형성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산에서 예수님을 통해 제자들과 우리들에게 주신 말씀-산상수훈-은 우리를 어떤 높은 도덕적 이상에 가두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과 자유를 풍성히 누리도록 주신 말씀입니다.

 

산상수훈은 물론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윤리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도덕적 완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변화되는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물 때 우리는 세상의 폭력으로부터, 탐욕으로부터 자유케 되고, 우리의 관계는 이웃으로, 세상으로 넓혀가게 될 것입니다.

 

산상수훈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입니다. 단지 먼 나라 이야기, 다가올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우리의 삶-성령의 인도함을 받은-우리의 삶입니다. 산상수훈은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이야기이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새로운 일에 대한 이야기이며,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의 이야기 입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기쁜 소식입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삶이었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의 삶이었고, 오늘날 우리의 삶의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를 통해 세상은 하나님의 치유를 맛보게 될 것이며, 회복의 기쁨을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 산상수훈을 우리 안에서 임하시는 하나님의 임재, 우리 안에서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기쁜 소식의 관점을 가지고 묵상하고 나눌 예정입니다. 다음 주는 산상수훈에 드러난 하나님의 나라라는 주제로 묵상하고 나눌 예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누구와 있던지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그곳에 계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산으로 올라가신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 임재 안으로 초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임재 안에 머물 때에만 우리는 예수님이 산에서 가르치신 삶을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갑시다. 하나님 임재 안에 머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