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풍조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예수의 제자들에게서 보는 몇가지 자질(특성) 

 

1:9~11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누가 인생은 ‘B D사이의 C 이다라고  하더군요. Birth Death사이의 Choice,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수많은 선택 중에서 무엇이 최선인지 고민하고 선택하고, 좋아하는 것과 필요한 사이에서 저울질하고 선택하고 , 따뜻한 잔을 마시고 싶을 때도 시에 무엇을 것인지를 생각하고 선택합니다. 중요한 , 번의 선택으로 인생의 길이 바뀌는 그런 선택은 더욱 신중히 고민하고 비교하며 결정합니다.  

60년대 시절에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라는 광고 문구가 있었습니다.  내가 어떤 선택의 자리에 있을 때면 광고 문구가 생각나곤 합니다.

 

지금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는 언제 어떤 이유로든 하나님을 믿기로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주의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린 (벧전 4:16),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는 이유로 고난 받는 이들을 구분하여 사용한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이 이제 이상 고난이나 생명을 제자의 삶을 의미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주님으로, 그의 제자로 살기 위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우리 모두에게 제자로서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합니다.

새롭거나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1우리가 알지만 자주 잊어 버리거나 알면서도 실천이 없는 무디어진 마음에 작은 노크소리가 되면 합니다.  내용의 많은 부분을 존스토트의 제자도 책에서 가져왔습니다.

 

첫째는 불순응이라는 문제입니다.

주변문화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세상풍조에 대해 무엇을 거부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는 주변세상에 대해 이중적인 책임을 집니다. 우리는 세상속에 살고 세상을 섬기며 세상에서 증인 역할을 감당해야 하지만 세상에 오염되지 말아야 하고, 도피하여 거룩함을 보존하려 해서도 안되고,  세상에 순응하여 거룩함을 희생시켜서도 안됩니다. 주변 문화를 따르지 말고 기독교반문화를 발전시켜야 하며,  타협하지 말고 참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삼키려 하는, 그래서 우리가 맞서야만하는 세상풍조는 무엇입니까?

 

다원주의의 도전입니다.

다원주의는 모든 주의는 나름의 타당성이 있으며 동등한 존중을 받을 권리가 있다 합니다.   따라서 이는 기독교가 최종적이며 유일하다는 주장을 거부하고, “ 자기들의 의견일 뿐인 것을 가지고 누군가를 개종시키려는 시도이고 순진한 오만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원주의에 어떻게 대응해야 합니까?

겸손해야 하고 우월감을 보이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유일성과 최종성은 계속 주장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이 유일하며 세상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속죄가 유일하며 예수님의 부활이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분이 아니라 유일하신 분인 예수님 외에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고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죽음을 이기신 이가 없음으로 오직 예수님만이 죄인을 구원할 자격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제자들이 맞서야 하는 세상에 널리 퍼진 다른 풍조는 물질주의입니다. 

물질주의는 단순히 물질세계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이 물질세계를 창조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좋은 것들을 누리도록 하셨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사도바울은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하기를 배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 하면서 검소하고 관대하고 자족하는 생활 방식을 익혀가라고 권합니다.

물질주의는 영적 삶이 질식당할 정도로 물질적인 것에 사로잡혀있는 것입니다. 이땅에서의 삶은 알몸이 되는 순간 사이의 짧은 순례여행입니다. 그러므로 짐을 가볍게 하고 여행하는 것이 지혜롭게 나그네의 삶을 사는 길입니다.

 

우리를 압박하지만 굴복해서는 안되는 또다른 현대풍조는 윤리적 상대주의입니다.

모든 면에서 도덕적인 기준이 헤이해져가고 있고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하며 절대적인 기준이라는 것이 남아 있기는 한지  의문을 품습니다.

상대주의가 우리문화를 잠식했고 교회에도 들어왔으며 상대주의가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 영역이 성윤리 영역입니다. 진정한 결혼관계에 필요한 헌신이 빠져버린 혼전동거가 널리 퍼져 있고 동성애 관계가 묵인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은밀히 감추던 죄악이 세상을 향해 삶의 다른 방식을 인정하라고 요구합니다.

이러한 풍조에 반하여 예수님은 그분의 기준을 따르고 순종하라고 요청하십니다. 결혼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정의하시면서 1:27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고’ ,   2:24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을 떠나서 아내와 연합하여 몸을 이루고 하나님이 지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하시며 가정의 신성함을 말하십니다.  우리의 윤리적 결점이 완벽 없겠지만 우리는 각자의 상황에 성경적 원리를 적용하는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토대가 되는 것은 예수님의 주님되심 입니다. ‘예수가 주님이라는 사실이 우리 삶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현대풍조의 네번째는 나르시시즘의 도전입니다. 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나르시스는 생긴 청년이었는데 연못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져 몸을 기울이다가 익사합니다. 이로부터 나르시시즘은 지나친 자기애나 자아에 도취된 상태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나르시시즘이 1970년대 자아 실현의 욕구를 강조한 인간잠재력 회복운동으로 나타났고 1980~90년대에 뉴에이지운동이 여기에 편승했습니다. 뉴에이지운동은 우리안을 들여다보라고 자신을 탐구해 보라고 말합니다.  우리문제를 해결할 있는 길은 우리안에 있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오는 구원자는 필요없다. 우리가 우리의 구원자가 있다 주장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이 교회에도 들아와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 이웃만 사랑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크고 첫째되는 계명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 계명을 이웃을 사랑하라 하셨지 자기 자신도 사랑해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말세에 나타나는 징표중의 하나입니다. 딤후 3:1~6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중략이러한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아가페 사랑의 의미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을 어떻게 봐야할까요?

자기긍정과 자기부정이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창조와 구속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있게 것은 모두 긍정하고 타락으로 인한 것은 모두 부정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건강하지 못한 몰입에서 돌이켜 우리의 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며 하나님의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 예배하고 섬기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사랑이 최고의 것임을 모든 사람이 알고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사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며 사랑이 없다면 인격은 붕괴됩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사로잡으려는 네가지 풍조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우리를 둘러싼 세상풍조의 영향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다원주의에 맞서서 예수님의 유일성을 옹호하는 진리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고 물질주의에 맞서서 검소한 순례자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상대주의에 맞서서 순종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고 나르시시즘에 맞서서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세상풍조에 불순응해야하는 것들입니다.

 

두번째는 닮음입니다.

 제자로서의 삶이 예수를 닮는다는 의미이며 그리스도를 닮는 것은 예정된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요일 2:6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섬김, 그분의 사랑, 오래참음, 그분의 선교를 닮아가야합니다. 닮아간다는 것은 성숙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숙 그리스도와 성숙한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것은 인격적으로 생명으로 유기적으로 그분과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예배하고 신뢰하고 사랑하고 순종함으로 성숙한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성숙하느냐? 진정한 예수는 어디서 찾을 있는가? 성경에서 찾을 있다는 것이 답입니다. 성경을 읽을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신뢰하고 순종하기 위해 전심으로 읽고 그의 권고를 받아들이고 그분을 바라보아야 것입니다.

 

제자도의 또다른 면은 개인적이고 사적인 영역에만 머무는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의무를 넓은 시각으로 보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바로 창조된 환경을 돌보는 일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인간을 위해 세가지 기본적인 관계를 세우셨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그분 자신과의 관계입니다 . 그분이 자신의 형상으로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이고 둘째는 서로와의 관계입니다. 인간은 태초부터 복수였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그분이 그들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신 선한 땅과 피조물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관계가 타락으로 인해 삐뚤어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회복계획에는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고 서로서로 화해하는 아니라 신음하는 창조세계를 돌보는 역시 포함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땅을 창조하셨고 ( 24:1 ‘땅은 여호와의 것이로다’) 그것이 우리에게 위임되었음을 기억한다면 (115:16 ‘땅은 사람에게 주셨도다’),  자연과 나은 관계를 발전시켜야 합니다. 창조주와 창조세계를 동일시하는 범신론자와 자연에 대해 스스로 충족되고 스스로 조정되고 스스로 영속한다는 메카니즘을 부여한 뉴에이지 가이아 운동의 혼란을 거부하고 자연을 신격화하는 일도 피해야 합니다.  

자연은 창조주가 아니라 창조세계라는 기독교적 인식 아래,  땅을 다스리고 정복하라고 하셨지만 파괴하고 착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책임있는 청지기가 되어 올바른 관계로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입니다.  크리스트 라이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한다고 하면서 예수의 제자라고 주장하면서 분의 소유인 땅에 관심이 없는 그리스도인 그들은 이땅이 오용되는 현실에 관심이 없을 아니라 낭비와 소비의 생활 방식으로 이땅의 오용에 동참하고 있다라고 질책합니다.

 

급진적 제자의 또다른 특징은 단순함 특히 돈과 소유에 대한 전적인 단순함입니다. 생명(life) (lifestyle) 서로 연결된 단어이며 따로 없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생명이 새로운 것이라면 또한 새로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삶이어야 합니까?  그리스도인이 아닌 이들의 삶과 어떤 차이가 있어야 합니까?

 

  12:15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하신 부의 위험에 대한 주님의 경고에 귀기울여야 합니다. 부는 걱정, 허영, 거짓 안정감을 가져오며 약한 자를 억압하고 궁핍한 자의 고통에 무관심하게 합니다. 19:23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거룩하고 겸손하고 단순하고 자족하는 삶으로 부르십니다. 그분은 또한 우리에게 그분의 쉼을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우리의 내적 평온을 방해하는 거룩하지 못한 욕망을 허용한다는 또한 고백할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의 평화가 끊임없이 새로워지지 못한다면 단순한 삶에 대한 우리의 강조는 한쪽으로 치우친 것이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에게서 보는 다른 특징은 의존입니다.

와이어는 우리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의존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자립하는 것이 적절하다 있겠지만 급진적 제자의 특징을 가장 보여 주는 태도는 의존이라 생각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사랑과 보살핌과 보호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의존하는 인생의 단계를 거쳐갑니다.  그리고 대부분 다른 사람의 사랑과 보살핌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육체적인 본성의 일부이며 하나님의 계획의 단면입니다.  때때로 노인들,   의식이 있어야 그리스도인 노인들까지도 아무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요. 앞가림을 있을 때까지만 살았으면 좋겠어요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옳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짐이 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당신은 내게 짐이 되도록 설계되었고 나는 당신에게 짐이 되도록 설계되었고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짐이 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가족의 ,  그리고 지역교회 가족의 역시 서로에게 짐이 되는' 삶이어야 합니다.    6: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 그리스도께서 몸소 의존의 위엄을 보이셨습니다. 의존해야 하는 아기로 태어나 십자가에 박힌 다시 의존하는 상태가 되셨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 의존이 인간에게서 그들의 최고의 가치인 위엄을 빼앗지 않으며 빼앗을 없음을 배웁니다.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으려는 것은 성숙이 아니라 미성숙의 표시입니다.   나아가 성경은 죽음을 생명의 끝이 아니라 생명으로 가는 문으로 봅니다.  성경이 약속하는 생명은 죽음을 통과하는 것이며 다른 조건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6:13에서 그리스도인은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다고 묘사합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순응하지 말아야 세상풍조,  그리스도를 닮음으로 성숙하여져가고, 창조세계를 돌봄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고,  단순한 삶을 통해 내적인 자유를 누리고 , 나눔의 삶을 살며,   의존함으로 서로의 짐이 되는 , 예수의 제자로서 우리가 거부해야 것과 이루어가야 것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경이 변할 없는 진리이지만 당시의 사회상과 역사를 알아야 이해할 있듯이 우리가 처한 오늘의 환경과 풍조를 알고 나아갈 믿음을 지키는데 힘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세상풍조는 나날이 갈리어도 나는 내 믿음지키리니

인생살다가 죽음이 꿈 같으나 오직 내 꿈은 참되니  ……

 

                                                                                찬송가 542 3 가사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