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 아름다움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자연의 경관, 노을, 사진사람, 참 많은 이미지가 우리의 마음에 떠오를 것입니다.

 

우리 말 아름다움의 어원은 약 네 가지로 구분한다고 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앓음다움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진주조개의 아름다움은 조개의 속살에 생긴 상처를 메워가면서 탄생되듯이 상처 때문에 아픈게 아니라 상처 덕분에 아름다운 것이 된다는 의미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아픔과 상처도 시간이 지나면 우리를 아름답게 만들어 가기 때문일 것입니다. 고통의 시간이 때론 우리에게 아픔이 되지만, 그 시간은 우리를 더 아름답게 성숙해 가게 하는 삶의 한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노신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고 합니다. “한응대지발춘화꽁꽁 얼어붙은 겨울 추위가 봄 꽃을 한결 아름답게 피우리라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아름다움은 고통을 통해 더 빛을 바라는 것인가 봅니다. 지금의 어려움과 고통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연의 삶, 인간의 삶의 한 순간이고, 그것은 더 아름다운 것을 피우기 위한 시간이라고 합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 겨울에 춥고 눈이 많이 오면, 아버지, 어머니뿐만 아니라, 동네 아저씨들이 자주 하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내년에는 풍작이겠는데..” 겨울 추위 속에서 내년의 풍년을 기대하는 농부들의 삶의 지혜는 오늘 날을 사는 저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고통에서 희망을 꿈꾸는 지혜를 배웠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고통가운데서 피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광야와메마른 땅에서 피는 하나님의 아름다움,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서 351절에서 말합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에 장미가 필 것이고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 곧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될 것이다.” 

 

아름다움!

사람은 본능적으로 아름다움을 찾는 성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눈을 통해 아름다운 자연을 보며, 예술품을 감상하며 그 아름다움에 감탄을 합니다. 예술가와 작가들은 그 시대의 아름다움을 남기기 위해 수 많은 자연의 모습을 그리고, 시로 표현하고, 음악으로 노래하고 했습니다. 그 무시무시한 종교의 권력 아래에서 감히 여성과 남성의 나체를 드러낼 수 없는 그 상황에서도 예술가들은 남자와 여자의 아름다운 몸을 조각했고, 동상으로 만들어 표현했습니다.

아름다움은 사람들이 거절할 수 없는 그 자체입니다. 아름다운 것은 사람의 마음과 눈길을 사로잡는 힘이 있습니다.

 

고대의 많은 철학자들도 , 아름다움을 정의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어떤 철학자들은 아름다움을 나 밖의 무엇에서 찾으려 노력했고, 보다 주관적인 철학은 아름다움은 내 안에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아름다움이 내 안에 있든지, 아니면 내 밖에 있든지 사람들은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왔습니다.

 

아름다움!

시대를 뛰어 넘은 매력입니다.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보다 보이지 않은 아름다움을 찾으려고 노력했던 시대도 있습니다. 문화적으로 동양 철학은 아름다움을 내면의 아름다움에서 찾으려고 했었습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을 사람의 최고의 아름다움으로 정의했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아름다움은 보다 더 감각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이 최고의 가치가 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을 부추기는 많은 미디어는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감각적인 매력이 어느덧 힘이 되었고, 돈이 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을 이용한 많은 상업이 발달 되면서, 외모 지상주의에 빠져들고 있는 우리 문화를 봅니다. 내면의 아름다움은 이제 따분한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한 성형외과의 광고를 본 적이 있습니다. 광고 문구는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은 여성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입니다. 완벽한 아름다움을 원한다면, ,,,가슴, 허리, 허벅지에 약간의 손만 데면 당신이 원하는 아름다움을 가질 수 있다라고 유혹합니다. 이러한 아름다움을 위해 많은 사람들은 시간을 투자하고, 돈을 투자합니다. 20세기 가장 흥행한 사업이 있다면, 다이어트와 성형 사업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질문을 해봅니다. “ 진정한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진정한아름다움을 찾아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움에 대한 실험을 했습니다. 독일 정신과 의사이자 과학저술가인 울리히 렌츠 박사가 쓴 <아름다움의 과학>아름다움을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어느덧 아름다움이 힘이 된 시대를 비판적으로 쓰고 있습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사람의 반응을 실험한 사람도 있습니다. 경제학자 에른스트 로이들은 사람들이 얼음물에 손을 담그고 얼마나 오랫동안 버틸 수 있는지를 측정하는 실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시간을 재는 실험자가 아름다운 여성일 경우 남자들은 두 배 가까이 더 길게 얼음물의 고통을 참아냈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참가자들이 너무 오래 참아서 동상에 걸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호주에서는 이런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선생님이 학생들의 성적을 매길 때, 사진을 놓고 매길 때와 그렇지 않을 때 점수의 차이는 10점 만점에서 1.5에서 2.7정도 차이가 났다고 합니다. 이쁜 여학생은 사진이 없을 때보다 최고 1.5가 올랐고, 그렇지 않은 학생은 2.7점이 떨어졌고, 외모에 따라 평균 0.7이 차이가 났다고 합니다.

 

다시 질문을 제 자신에게 해봅니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 감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시대에 나는 어떠한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하는가?

 

외모가 힘이 된 시대, 힘이 아름다움이 된 시대, 성공과 부가 아름다움이라고 말하는 시대, 권력이 아름다움이라고 말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보고 발견하며 살아가야 하나요?

 

베드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머리를 꾸미며 금붙이를 달거나 옷을 차려 입거나 하여 겉치장을 하지 말고, 썩지 않는 온유하고 정숙한 마음으로 속 사람을 단장하도록 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값진 것입니다. (3:3-4)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외모가 아니라, 우리의 내면의 아름다움을 단장하라고 말합니다. 아름다움이 눈에 보이는 것에 있지 않고, 속 사람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외모에 상관없이 속 사람이 사람의 아름다움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시편 기자는 시편 90편에서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임하게 하사 우리 손의 행사를 우리에게 견코케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한글 개역성경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 표준 새번역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시편 8편은 노래합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시편 기자는 온 땅에 가득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노래합니다. 아름다움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는 성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며 노래하는 것은 참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저자들은 사람의 외모가 아닌, 내면 즉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속 사람의 아름다움을 보라고 우리를 격려합니다.

 

하나님도 아름다움을 보고 감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면 말씀하십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아 정말 아름답구나감탄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시고, 모든 것들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면 또 감탄하십니다. “참 보기가 좋구나.”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자연 속에서, 사람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아름다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까?

 

창조 이야기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당신이 만든 모든 것들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에서 발견됩니다. 인간이 죄로 인해 그 조화/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깨어졌을 때 하나님은 많이 슬퍼하셨고, 당신의 그 아름다움을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실 정도로 하나님은 자연과 사람과 더불어 사는 조화로운 삶을 회복하기 원하셨습니다. 조화로운 삶 안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외모가 진정한 아름다움이었다면, 창조의 하나님은 외모가 예쁜 사람들만 만드시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는 전혀 예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온전하게 표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그에게 등을 돌린 세상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회복해 가시는 과정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세상에서 죄의 노예가 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찾아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은총/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이사야 35장도 당신의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찾아 오시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영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1-2절입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광아름다움과 같은 의미로 사용합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 물이 없고 생명이 살 수 없는 거친 땅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회복 될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그 땅들이 경험하고 노래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 같은 이 세상에 다시금 에덴 동산 같은 아름다움을 회복하기 위해서 찾아 오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나라를 잃고 바벨론에 사로 잡혀간 이스라엘 포로들을 말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타국에서 낯선 사람, 포로, 노예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아름다움이 아니라 노예의 고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정의와 공평이 아니라 억압의 속에서 살아 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오셔서 그들을 다시 회복하실 하나님의 영광, 그 아름다움을 다시 기뻐할 그들, 즐거이 노래할 그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즉 아름다움은 이 땅을 회복하시는 하나님, 이 땅을 찾아 오시는 하나님에서 찾을 수 있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아름다움 맛본 사람들은 즐거이 기쁨으로 노래할 것입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오 주님, 하나님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만약 우리가 세상의 거짓된 아름다움에 유혹되지 않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를 원한다면, 시편 기자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던 것처럼, 우리도 매일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노래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그 하나님의 영광/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을까?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우리의 삶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722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됨에서 발견됩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하나됨에서 발견되어 집니다. 하나된 다는 것은 일체성/unified가 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조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각적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그 것을 최고의 가치, 힘으로 만들어 가는 세상에서 참으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사람들로 그 아름다움을 보게 해야 하는 소명이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도록 어두움에서 밝은 빛으로 불러냄을 받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고, 자녀이고, 그에게 소유된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조화를 이루고, 하나됨으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회복하고 자랑해야 하는 삶의 영역을 나누고자 합니다. 하지만 하나됨을 위해서, 조화로운 삶을 위해 우리는 많은 고통, 나를 포기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합니다.

 

하나됨, 조화로운 삶은 바로 고통 가운데서 피어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하나되기 위해서, 우리와의 친밀함을 위해서 당신의 외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의 아름다음을 회복해야 하는 곳은 "가정"입니다.

 하나됨, 조화로운 아름다움은 창조 이야기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홀로 있는 아담이 안쓰러워서 하나님은 그의 갈비뼈를 하나 뽑아서 여자를 만드시고, 그녀를 아담에게 데리고 옵니다. 아담이 보고 말합니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그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부부, 남편과 아내의 하나됨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맛보고 자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 아니, 남편과 아내의 연합은 아름다움입니다. 그 아름다움을 보고 하나님은 보시기에 참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부부의 아름다움을 지켜가야 합니다. 부부의 아름다움은 외모에 있지 않습니다. 친밀한 관계에 있습니다. 버라드 쇼가 말했다고 합니다. “미인은 처음으로 볼 때는 매우 좋다. 그러나 사흘만 계속 집안에서 상대해보면 더 보고 싶지가 않게 된다.” 외모의 아름다움은 순간입니다. 그렇지만 함께 하는 아름다움, 친밀함은 영원한 것입니다.

 

즉 관계의 하나됨, 남편과 아내의 조화로운 삶은 영원한 아름다움입니다. 그 아름다움을 창세기 1:2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상상해 보십시오. 두 남녀가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은 관계가 바로 부부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관계는 남편과 아내, 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은 관계입니다.  하지만 요즘은 이 아름다운 관계가 자꾸만 깨어집니다. 벗어서 마음에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있는 관계는 아름다운 관계가 아닙니다. 죄는 서로를 부끄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아담과 이브, 뱀의 유혹으로 선악과를 먹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처음 발견한 것은 그들이 벗은 모습이었고, 부끄러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를 가립니다. 서로의 부끄러움을 가립니다. 서로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고, 숨기는 관계는 죄로 인해 깨어진 관계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슬프게도 이 시대에 많은 가정들이 깨어지고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 서로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친밀함이 아니라 의무로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형제자매님, 자녀들이 우리의 아름다운 관계를 보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우리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부부의 아름다움을 지키며 살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부부의 아름다움을 우리 안에서 발견 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벗었으나 부끄럽지 않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서로에게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부부의 친밀함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표현입니다.

 

두 번째 영역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우리가 고백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몸입니다. 예수가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우리는 그 몸의 지체로 연결되어져 있습니다. 교회의 아름다움,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됨에 있습니다. 하나됨은 비슷한 사람들끼리, 비슷한 조건의 무리의 사람들이 연합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계층의 사람들, 지친 자들, 두려워하는 자들, 가난한 자들, 교회서 가장 연약한 자들과 함께 더불어 이루어가는 모습에서 발견됩니다. 연약한 자를, 가난한 자를 교회에서 소외시키지 않은 것이 교회의 하나됨이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발견되어 집니다.

 

이사야 353-4,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여주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여주며, 겁내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굳세게 하라,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수하시며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연약하다고, 부족하다고 가난하다고, 병들었다고, 장애를 가졌다고, 피부 색깔이 다르다고 편을 가르고 차별하지 않고, 서로를 격려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함께 바라보는 교회의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 아름다움은 빛나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는 참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여자나 남자나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고 말했지만, 교회의 역사에서 참 많은 차별을 두고 살았습니다. 여자와 남자의 차별, 백인과 유색인종의 차별, 특별히 백인 교회는 흑인들이 자신들과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차별했습니다. 마틴 루터킹 목사님의 그 유명한 설교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에서 그는 꿈꾸었습니다. 백인의 아이들과 흑인 아이들이 함께 뛰며 뒹굴며 조화를 이루며 사는 세상, 교회를 말입니다.

 

이제 교회에서 인종의 벽은 허물어 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교회에는 보이지 않은 벽이 존재합니다. 요즘 시대는 부의 기준이 교회 안에서 차별을 만든다고 합니다. 부한 자와 그렇지 못한 사람들간의 새로운 벽이 생겼습니다. 부자들은 큰 교회로, 가난한 자들은 작은 교회로라는 말이 생길 정도 입니다. 교회는 함께 더불어 사는 조화를 이루며 사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어떠한 벽도 존재해서는 안됩니다.

 

만약 장애를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섬김을 받은 사람, 비장애인은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며 함께 사는 사람이 되는 모습이 교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저는 우리의 교회가 그러한 교회가 되기를 꿈을 가집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들이 서로 격려하며 하나가 되어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교회, 장애인과 비 장애인이 서로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함께 기쁨으로 주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교회, 싱글맘 혹은 싱글아빠가 아이들과 함께 와서 우리들과 조화를 이루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노래할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어려움과 고통을 당하는 형제자매를 외면하지 않고, 그들의 약한 손의 힘이 되어주며, 떨리는 무릎의 버팀목이 되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구원의 희망을 함께 공유하는 그래서 그들이 광야와 메마른 땅에 꽃이 피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그러한 교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우리 서로에게 힘이 되어 줍시다. 우리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줍시다. 우리 서로에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맛보게 하는 사람들이 되어 줍시다. 우리 서로의 연약함을 안아주는 사람들이 되어 줍시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는 교회가 됩시다.  

 

세 번째 영역은 세상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어둡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숨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많은 뉴스들은 너무 어두운 소식들만 전해 집니다.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너무 쉽게 잊혀지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비출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습니다.

 

5-6, “그 때에 소경이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이는 단지 한 사람의 회복을 말하고 있지만은 않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합니다. 즉 사회의 회복입니다. 얼마 전에 읽은 읽는 기사에 따르면, 오늘 날은 부의 세습으로 인한 새로운 계층의 구별이 생긴다고 합니다. 부에 따라 세상의 관계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세상은 더 가진 자들을 위한 정책을 우선적으로 세웁니다. 하지만 이사야 선지자가 꿈꾸는 사회는 그 안에서 가장 소외 받은 장애인, 소경, 귀머거리, 저는 자 벙어리가 회복되어지고 함께 하나님을 노래하는 사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교회에서의 조화로운 삶이 아니라, 사회에서 약자들과 더불어 살고, 부자와 가난한 자들이 함께 도우며 살아갈 수 있는 사회로의 회복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11장에서 하나님의 회복에 대한 노래입니다. 이 땅을 회복하기 위해 오시는 하나님과 창조의 원래의 조화로운 모습으로 바로 잡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예언자는 노래합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고, 귀에 들리는 대로만 재판하지 않는,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이 다시 회복되어지는 시대,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가, 그리고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찬 땅에 대한 그림을 이사야 선지자는 그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회복해 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사회에서 소외된 약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회복해 가야 하는 소명이 교회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세상의 빛, 약한 자들의 빛이 되어 주셨습니다. 성탄절을 단지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는 날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오셔서 회복하고자 했던,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가정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세상의 가장 연약한 자들과 함께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