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인사하기, “함께 있어서 고맙습니다.”)

오늘 본문은 유대인 베드로와 로마 백부장 고넬료가 만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을 통해 네 가지를 묵상하고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기다리는 마음,” 두 번째는 “인격과 인격의 만남,” 세 번째는 “그러므로의 신앙,” 그리고 네 번째는 “이웃”입니다.

1. 기다리는 마음
베드로는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과 함께 길을 떠납니다. 그 다음 날에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도착합니다. 베드로가 오고 있는 동안 고넬료는 그의 가족뿐만 아니라 가까운 친구와 친척을 모두 불러 놓고 베드로가 오기만을 기다립니다. 베드로를 기다리는 그의 마음은 설레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기 위해 베드로를 불러 오라고 하셨을까?

봄이가 학교에서 fieldtrip를 가기 전 날에 자주 이런 말을 합니다. I can’t wait till tomorrow. “나는 내일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 오늘이 그날 이었으면....” 고넬료의 심정입니다. 기대하며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기대함,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실까? 하나님을 기대하는 마음은 참 소중한 마음입니다. 오랜 신앙 생활을 하다 보면 우리는 기대하는 마음과 설레임이 사라지는 것을 발견하곤 합니다. 저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 말씀을 읽은 것이 때론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자신을 보곤 합니다. 어떤 기대함이 없이, 셀레임도 없이 그냥 읽어야 하니까? 읽고 있는 나, 아니면 그냥 책을 읽듯이 읽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인데... 성령의 호흡이 있는 말씀인데... 너무 건조하게 글자 만을 읽고 있는 저를 봅니다.

고넬료의 기대함으로 기다리는 마음...그 마음으로.... 설레임으로 매일 하나님 말씀을 읽는다면... 고넬료의 고백처럼... 매일 성경을 열을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하나님 앞에 있는 마음으로 말씀을 읽는다면. 나의 필요와 위로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생명의 하나님이 나의 바로 앞에 있음을 진실로 인식하며 읽는 다면, 우리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을까요?

나의 지적인 만족이나, 오늘 말씀을 읽었다는 위안을 위해서가 아니라, 성경에서 하나님을 늘 만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선다면, 글자가 단지 글자가 아니라, 생명력 있는 살아 있고 능력이 있는 말씀으로 우리 안에 다가 올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기자의 고백처럼, “하나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늘 기대하는 마음으로 겸손히 주님 앞에 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아버지의 음성을 듣는 것이, 사랑하는 아버지와 함께 하는 것이 즐거움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는 다는 것은 “빈 마음으로 가난한 심령, 열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예화를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선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한 방문객이 난인이라는 선생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선생의 이야기는 듣지도 않고 계속 자신의 생각만 이야기했습니다. 한참 후에 난인은 그에게 차를 대접했습니다. 그런데 방문객의 잔이 가득 찼는데도 난인은 계속 차를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방문객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잔이 다 찬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더 이상 채울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난인이 대답하기를, “이 잔과 같이 당신은 자신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소. 당신이 빈 잔을 내 놓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당신에게 선을 줄 수 있겠소?”라고 했습니다.

기대하는 마음, 기다리는 마음은 바로 내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우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하십시오. 내가 주님 앞에 있습니다. 내가 듣겠습니다. 내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겠습니다.” 나의 생각을 멈추고,나의 말을 멈추고 하나님 앞에 잠잠히 서는 것을 말합니다.

기대하십시오. 하나님의 큰 능력/축복만이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신비적 체험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삶에 변화를 가져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단지 고넬료에게 천사를 보내 “고넬료야 내가 너의 기도와 구제를 기억한다”로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베드로를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고넬료에게 듣게 하셨습니다. 고넬료의 하인들이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저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너를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리라.” 고넬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베드로를 집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신비적 체험, 혹은 천사를 통한 음성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충만함에 이르도록 하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비적 체험만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더 영적인 삶으로 오해를 합니다. 물론 저도 신비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을 갈망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일상의 삶에서 우리에게 성령의 영감으로 쓰여진 성경을 통해 매일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더 많이 닮아가도록 인도합니다. (인터넷에서 설교를 듣는 것 보다 말씀 읽고 묵상하는 것을 더 즐거워하십시오.)

천사의 지시를 따라 고넬료가 베드로를 불러 오도록 지시를 한 것은, 베드로를 통한 기적을 보기 위함이 아니라, 그를 통해 하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입니다. 고넬료의 마음은 33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고넬료가 환상 중에 하나님의 천사를 본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고넬료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매 순간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하나님 앞에 머무르십시오.

2. 인격과 인격의 만남

25-26절입니다. “베드로가 들어오니, 마중 나와서 그의 발 앞에 엎드리어 절을 하였다. 그러자 베드로는 “일어나십시오. 나도 역시 사람입니다” 하고 말하면서 그를 일으켜 세웠다.

드디어 베드로와 고넬료가 만납니다. 유대인 베드로와 로마 백부장의 만남입니다. 사회적 관계를 보면, 서로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로마 백부장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들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에게도 위협적인 존재입니다. 베드로가 그리 만나고 싶어하는 부류의 사람이 아닙니다.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자들이 로마 군인입니다.

백부장 고넬료에게 베드로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식민지의 한 촌로에 불과합니다. 베드로는 정치적, 종교적으로 아무런 힘도 없는 사람, 그냥 무시하고 살아갈 수 있는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통상적으로 보면 고넬료가 베드로를 만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만남입니다.  

하지만, 오늘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은 아주 특별합니다. 민족 (유대인과 이방인)과 사회적 지위를 뛰어 넘는 만남입니다. 그 만나는 순간도 다릅니다. 사회적으로 보면 높은 위치에 있는 고넬료가 한 무명의 베드로에게 무릎을 끓고 경배하며 그의 집으로 맞아들입니다. 그 당시 최고의 경의를 표시하는 것입니다. 고넬료는 베드로를 하나님이 보낸 신적인 메신저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그것을 당연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나도 역시 사람입니다.”

세상은 사람을 만날 때 사람의 사회적 지위나 위치에 따라 다르게 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지위”에 따라 우리의 태도를 결정하곤 합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일상의 삶에서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조차 그 지위를 드러내고 싶어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그 무엇”, 다름이 존재합니다.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에서 그들 사이에 있는 신분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가 자신을 신적인 존재로 경배하는 것을 거절할 뿐만 아니라, 고넬료, 이방인을 개처럼 여기지 않습니다. 그는 동등한 사람으로 대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그들은 사람과 사람으로, 그들 사이에 있는 “그 무엇”으로가 아니라, “인격과 인격”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위 말하는 “세상의 지위나 권력”도, 그리고 교회에서 말하는 “영적인 권위”도 하나님 안에서 다시 거듭나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의 권력이나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서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는 동등한 하나님의 자녀로 만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안에는 신분의 차이가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가난한 자와 부자의 차이도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목회자도 평신도의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사랑 받는 자요, 서로 존중하는 자요, 서로의 무거운 짐을 나누어 지는 사람들입니다.

베드로 그의 영적 권위를 내려 놓습니다. 고넬료, 그의 세상적 권력을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과 사람, 인격과 인격으로 하나님 안에서 서로 만납니다.    

3. 그러므로

28절과 29절입니다.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

베드로가 말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그 경계를 넘는 것은 유대인으로서 율법을 어기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나도 알고 당신들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의 명을 따라 이곳에 왔다.

한국어 성경에 번역되지 않은 헬라어가 있습니다. 영어로는 “therefore”로 번역되는 “디오”입니다. 헬라어 성경은 29절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디오 카이 아난틸흐레토스 엘돈” “그러므로 정말로 나는 반대나 반박 없이/ 혹은 주저 없이 왔다” 제가 묵상하고 나누고 싶은 중요한 단어는 “그러므로, therefore”입니다. 아쉽게도 한국어 성경에는 번역이 빠져 있지만, 아주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는 접속사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과 같이 유대인인 베드로가 이방 사람의 집에 들어 가는 것은 불법입니다. 만약 다른 유대인들이 그 사실을 안다면 베드로는 많은 비난을 받아야 합니다. 베드로 또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1장을 보면, 실제로 베드로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할례 받은 유대인들로부터 비난을 듣습니다.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들어 갑니다. 왜요?

베드로는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이해 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나와 다른 생각이지만, 내가 받아온 교육과는 다르지만, 내가 그 동안 살아왔던 습관과는 다르지만, 반대하지 않고, 지체하지 않고 즉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움직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기에, 유대의 전통은 금하지만/ 자신의 상식과 지식으로는 받아드릴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합니다.

정리하면, 이렀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순종합니다.” 저는 이런 삶을 “그러므로”의 신앙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러므로”의 신앙은 자발적 순종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했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에, 하나님의 인격을 신뢰하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자발적으로 따르는 신앙입니다. 때론 그 길이 험난한 길입니다. 때론 그 길이 고난의 길입니다. 나의 길과는 전혀 다른 길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에, 순종하며 걸어가는 삶의 모습입니다.  

사도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그러므러” 접속사를 많이 사용합니다. 우리가많이 외우고 있는 로마서 12장 1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려라.” 로마서 1-11장까지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끊을 수 없는 사랑에 대해 말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기쁨에 대해 말합니다. 구원받은 자의 은혜를 말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요 사랑 받는 자녀이다.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그 무엇도 끊을 수가 없다.”

12장 1절은 그러므로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려라.” 골로새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를 세 번 사용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사람이 된 우리의 삶을 말합니다. “그러므로”는 예수의 제자들의 삶을 보여 주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또한 “그러므로” 나와 이웃을 연결해 주는 고리입니다.  

우리는 자주 “--하면”의 신앙에서 머물곤 합니다. 다시 말하면, “조건적 신앙”에 머물곤 합니다. 이것은 자발적 신앙이 아니라 율법적 신앙입니다. 율법적 신앙은 율법을 얼마나 강조하느냐가 아니라,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조건적으로 만드는 모든 신앙”의 모습입니다.

예를 들면,  
주일 성수를 잘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지
십일조를 잘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지,
구제를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지...
교회에서 봉사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지..

물론, 이 또한 필요한 한 부분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신앙이 “--하면”의 조건적 삶에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자발적 순종의 삶으로 성숙해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에 사랑할 수 밖에 없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맛 보았기에 하나님을 진심으로 예배할 수 밖에 없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에 이웃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삶이 바로 “그러므로, 자발적 순종의 삶”입니다.  

베드로는 압니다. 그가 받을 비난이 얼마나 클지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셨기에 갑니다.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예수님이 걸으신 길이 험난한 길이었음을 압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이 세상에서 그리 인정받는, 유명한 길이 아니었음을 압니다. 그 길을 따라 걸어야 하는 우리에게 닥칠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에,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기에, “그러므로” 우리는 그 길을 자발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깊은 경험, 예수님이 보여 주셨던 깊은 사랑, 누구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고 친구로 맞아 주셨던 예수님의 삶에 대한 경험, 믿을 통해 율법주의로부터 해방될 때 생겨나는 능력의 경험, 자신의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신실하심의 경험, 성령이 오셔서 주신 능력의 경험, 성령의 음성을 듣는 삶이 우리를 “그러므로”의 자발적 순종의 삶으로 인도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삶입니다.

4. 나의 이웃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10장 31절을 읽겠습니다.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하나님이 고넬료의 기도를 들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구제하는 삶을 기억하셨습니다. 고넬로의 모습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은 단지 하나님과의 관계만을 중요시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늘 이웃을 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할 뿐만 아니라 이웃의 존재를 인식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한다 하면서, 나의 이웃의 아픔을 보지 못한다면, 나의 이웃의 필요를 보고도 무시하고 살아간다면, 나의 기도는 공허한 징 소리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과 이웃을 함께 보는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삶, 모든 곳에, 특별히 사람들의 삶 가운데 존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방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샤머니즘을 생각해 보십시오. 무당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영적인 것, 혹은 신에 관심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웃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나의 복/ 나의 필요만 채울 수 있다면 그것으로 그들은 만족합니다. 이웃을 보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이웃의 필요는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사극을 좋아합니다. 요즘, 동이를 가끔씩 봅니다.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장희빈의 어머니가 이른 아침에 정화수를 떠놓고 날마다 기도합니다. 인현왕후를 폐위시키고, 자신의 딸, 장옥정을 중전에 앉게 해 달라고. 우상들에게 이웃은 없습니다. 단지 나와 우상만 존재할 뿐입니다.

만약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 하면서 이웃을 멸시한다면, 우리는 살아계신 참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만든 신, 하나님이라 칭하는 어떤 신을 섬기는 자일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이웃과 늘 함께 계십니다.

무소부재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하면서 이웃의 굶주리고, 목마르고 배고픈 사람들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사람이 되신 참 하나님,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일 것입니다.

성경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던 야합의 아내, 이사벨을 우리는 잘 압니다. 어느 날 야합 왕이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궁으로 돌아옵니다. 이사벨이 궁금하여 묻습니다. 야합 왕이 대답합니다. 왕궁 가까이에 있는 나봇의 포도원을 사서 채소밭을 만들고 싶은데 고집쟁이 나봇이 그것을 팔지 않는다. 이사벨은 자신이 포도원을 빼앗아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나봇을 신성모독의 죄목으로 돌로 쳐 죽입니다. 그리고 양심의 가책도 없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아 야합 왕에게 줍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이사벨에게 이웃/ 사람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단지 자신의 필요/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데 바알/아세라가 필요했습니다. 이렇듯 인격이 아닌 신, 사용할 수 있는 신, 객체에 불과한 신을 섬긴다면, 이웃들도 마찬가지로 인격이 아닌 대상, 사용할 수 있는 무엇, 객체가 되어버립니다. 힘이 있으면 지배할 수 있는, 힘이 있으면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억압할 수 있는 대상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삶에 관여하시는 분이십니다. 야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고 기뻐서 돌아옵니다. 야합을 기다리고 있던 엘리야가 하나님의 심판을 그에게 말합니다. “나봇의 피를 핥던 개들이 같은 자리에서 네 피도 핥으리라.”

우리의 하나님은 살아계신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삶에 관여 하시는 하나님은 나의 이웃의 삶에도 관여 하시는 분이십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나의 이웃과도 함께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나의 이웃을 또한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과 이웃을 자주 동일하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것은 그 지으신 자를 멸시하는 것이다.” “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라”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소자에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다.”

나의 이웃을 경멸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하나님을 경멸하는 자요. 하나님께 기도한다 하면서 나의 이웃의 아픔과 어려움을 외면하는 사람은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외면하는 사람입니다.

고넬료, 그는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고,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바로 이웃의 아픔과 어려움 속에서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았던 사람입니다.

우리는 고넬료의 삶을 통해 균형 잡힌, 성숙한 제자의 삶을 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 하나님은 바로 그런 고넬료의 기도를 들으셨고, 그의 구제하는 삶을 기억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싶으십니까? 이웃을 보십시오.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묵상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을 기대하며 기다리는 마음으로 말씀 앞에 서십시오. 매 순간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자가 되십시오. 하나님 안에서 세상의 구별은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모두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 안에서 인격과 인격으로서 서로를 존중하는 만남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과 조건적 관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의 자발적인 순종의 삶”이 되십시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모든 조건을 내려 노십시오. 기도하는 삶은 이웃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삶입니다. 나의 이웃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매일 경험하는 삶을 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