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세요? 성령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이번 일 주일 동안 성령님이 어떤 분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령님을 더 잘 알고 싶고, 성령님과 더 친해지고 싶었습니다.  

오늘은 함께 성령님을 묵상하고 싶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당신을 계시해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 시간에 성령님이 우리에게 충만이 임재하시기를 기대합니다.

여러분은 성령님을 만나신적이 있나요? 특별한 성령님의 임재를 경험하신 적이 있으신지요?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시면서 당신이 이제 제자들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는 줄을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만 남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제자들의 근심하는 마음을 예수님은 잘 아셨습니다.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14장 1절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보혜사 곧 진리의 영이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15장에서 예수님은 다시 제자들에게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가려 뽑아냈으므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갈수록 제자들의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로 믿고 따르던 예수님, 예루살렘에만 가면 예수님과 함께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대와 꿈을 가지고 따르던 예수님이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나는 너희를 떠나 이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로 간다고 말씀하시고,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점점 더 마음이 무거워지고, 두려움은 파도처럼 제자들의 마음에 밀려왔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더 심한 말씀을 하십니다. 보다 더 구체적으로 제자들이 앞으로 겪게 될 고난에 대해 말합니다. 세상이 그들을 어떻게 대하고 미워하는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먼저 16장 1-6절입니다. 예수님이 갑자기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를 죽이는 사람마다, 자기네가 하는 그러한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갈 할 때가 올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그들은 마음에 슬픔으로 가득찼습니다. 제자들은 속으로 말했을 것입니다. “예수님, 우리 만을 남겨두고 멀리 떠나신다는 것만도 우리의 마음이 무겁고 슬픕니다. 그런데,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고, 우리를 회당에서 내쫓고, 우리를 죽일 것이라는 말씀은 우리를 너무 두렵고 무겁게 합니다.” 제자들의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찼기 때문에 예수님께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회당에서 내쫓기는 것은 제자들만 두려워했던 것은 아닙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이미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회당에서 내쫓기로 결의를 했습니다. 요한복음 9장 22절을 입니다. “그 부모는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회당에서 내쫓기로, 유대사람들이 결의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12장 42절입니다. “지도자 가운데서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 많이 생겼으나, 그들은 바리새파 사람들 때문에, 믿는 다는 사실을 드러내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회당에서 쫓겨날까봐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이렇듯이 회당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유대인 모두에게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을 상징하는 회당은 유대인들의 삶에서 아주 특별한 장소였습니다. 랍비들은, ‘아무리 오래 기도한다고 해도 그것이 회당에서 드린 기도가 아니라면, 그 기도는 쓸모가 없는 기도요,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고’ 가르치곤 했습니다. 회당에서는 매일 세번의 예배와 안식일 예배가 드려졌다고 합니다. 회당은 유대인들의 종교적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회당은 예배와 말씀 강론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회당에서 유대인들은 만나고 또 생활의 정보를 나누고, 교제하는 사회 생활의 중심이었습니다. 예를들면,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만나 사업이야기도 나누고 혼담이야기도 서로 교류했다고 합니다.

회당은 공동체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회당에서 드리는 예배에 참여를 못 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유대 공동체로부터 출교를 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이방인 취급을 당하는 것입니다. 즉 모든 사람과의 관계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더불어 살아 갈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회당에서의 출교는 그러한 모든 사회적 관계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회당에서 출교를 당한다는 것은 제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유대인들에게도 너무나 크고 견디기 어려운 처벌이었습니다.

회당에서 출교를 당하는 것만도 제자들이 감당하기 어려운데 예수님은 더 나아가 제자들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죽이는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여긴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면?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예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들,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와 다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사람을 핍박한 일은 초대 교회, 제자들에게만 일어났던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교회사를 통해 이러한 일들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카톨릭과 기독교가 서로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핍박했고”, 많은 사람을 심판했고, 종교 개혁 당시는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 교회가 제세례파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핍박하고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많은 잘못들을 과거에서뿐만 아니라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늘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만 옳다고 주장하는 것, 우리만이 최고라고 주장하는 것, 나만의 생각이 옳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고집하는 자세,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자세... 이런 태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하나님을, 예수님을 우리의 잣대로 제어서 끼워 맞추고 나와 다른 이들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신념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옳다고 여기는 소신만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진리는 내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내가 속해 있는 교회, 내가 속해 있는 교단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의 능력으로 너희의 힘으로 그분을 따라 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너희에 핍박이 오면 너희는 나를 버리고 도망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연약합니다. 너무 강한 의지는 자주 하나님과 상관없이 나의 고집을 내세우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보혜사, 진리의 성령님을 아버지께서 제자들에게 보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너희의 힘과 의지로는 나를 온전히 따를 수 없다. 내가 말한 것을 이해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온전한 진리로 인도할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보혜사, 성령님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예수님의 언약처럼 예수님이 떠나신 후에 제자들에게 오셔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를 수 있도록 도우셨습니다.

우리는 바로 파라클레테, 보혜사, 진리의 성령님으로 인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우리의 신념을, 우리가 속해 있는 교단의 신학을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이 약속한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그분의 계시와 가르침을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늘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땐 우리가 옳다고 여기는 모든 것조차도 내려 놓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요한은 다른 복음서 저자와는 다르게, 성령님을 “파라클레테 (Paraclete)로 표현합니다. 한국 성경은 ‘보혜사’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몇 주전에 파라클레테에 해당하는 Greek, “Parakletos”가 “helper-도우시는 분” “comforter-위로해 주시는 분, 격려하시는 분”의 의미가 있다고 했습니다. Greek, “Parakletos” 아주 풍부한 뜻을 가지고 있어서 한 영어단어로 표현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Parkletos”의 또 다른 의미는 법정에서 사용되는 용어인데요, 하나는 법정에서 고소를 당한 사람을 위해 변호해 주는 “변호자 (advocate)”라는 뜻이 있고, 또 다른 뜻은 법정에서 서로를 중재하는 “중재자 (intercessor)”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성령님은 사탄의 정죄로부터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탄은 날마다 우리를 정죄합니다. “너는 죄인이다. 너희 죄는 이러이러하다. 너는 이것을 잘못했기 때문에 너는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다. 너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다. 쉴새 없이 사탄은 우리를 정죄합니다. 그때마다 성령님은 우리를 변호하십니다. “너의 죄는 이미 용서를 받았다. 너는 이제 죄인이 아니다. 너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산 하나님의 자녀다. 너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다.”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낮은 자존감을 가지도록 자꾸 속삭입니다. “너 제만큼 가진 것 있냐? 너는 잘 하는 것이 있냐? 너는 사랑 받을 자격이 없어. 너는 쓸모없는 사람이다. 너 같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른다고... 네가 어떻게 예수님처럼 살수 있겠니.. 등등.. 하지만 성령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신다. 하나님은 너를 정죄하시는 분이 아니라 너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다.”라고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기억하게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당신을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탄의 정죄와 거짓 속삭임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시고,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또한 중재자이십니다. 변호하시는 성령님은 우리를 정죄하는 사탄으로부터 우리를 변호하신다면, 중재자 되시는 성령님은 우리 안에 잇는 다툼과 분쟁을 중재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안에 어떤 분쟁이 있을 경우, 성령님은 서로를 중재하시는 분이십니다. 사탄은 서로의 잘못/실수를 정죄하게 해서 분쟁을 부추기고 분열을 가져 온다면, 성령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함께 바라보게 하시고, 그 예수님의 용서를 통해 서로를 용서할 수 있도록 돕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예수님 통해 서로를 볼 수 있도록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중재하시는 성령님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화해와 일치를 이루도록 돕는 분이십니다.

정리하면, Greek, “Paraketos”의 의미로 본 성령님은 어떤 마술적 능력이나 힘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과 동일하게 인격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계셔서 돕는 분이시고, 위로하고 격려하시는 분이시고, 변호하시는 분이시며, 중재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성령님을 정리하면서 다시 16장 7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주겠다.”  

슬퍼하고 낙담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다. 왜냐면, 내가 가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는 순간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몸으로 있는 동안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하나님으로부터 온 메시아라는 사실조차 간신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밤, 제자들은 예수님을 홀로 나두고 모두 도망을 갑니다. 예수님이 몸으로 제자들과 함께 사시는 동안,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깨달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마다 그들은 서로 안에 다른 생각을 품고 잘못 이해할 때가 많았습니다. 때론 누가 더 큰 자가 되는 지에 대해 서로간에 논쟁이 있곤 했었습니다.

그래서 13-14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직도,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지금은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듣는 것만을 일러주실 것이요,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14장 26절에서 예수님은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성령님이 오시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온전히 이해하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시고, 그래서 제자들이 깨닫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진리 가운데로 제자들이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곧 제자들에게 더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온전하게 아는 것, 그분의 가르침을 온전히 깨닫게 되는 것이 제자들에게 지금 당장은 예수님이 떠나는 것이 슬픈 일이지만, 더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유익함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했고,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지 못했다 하더라도, 성령님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도록 도우시고,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깨달을 수 있도록 돕는 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오늘도 우리에게 깨닫고 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또 다른 유익은 육체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와 영원히 거하실 수 없으십니다. 육체를 입으신 예수님이 계시는 것은 한정적이십니다. 그러나 영으로 오시는 성령님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요14장 16절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즉 성령님은 마28:20절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약속을 우리에게 이루어 주신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영이십니다.

16장 8-11절을 보겠습니다. 성령님의 또 다른 역할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실 것이다. 죄에 대하여 깨우친다고 함은 세상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요, 의에 대하여 깨우친다고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고 너희가 나를 더 이상 못 볼 것이기 때문이요, 심판에 대하여 깨우친다고 함은 이 세상의 통치자가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므로 그를 맞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진리의 영을 알지 못하는 세상은 죄가 무엇인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참된 의가 무엇인지를 볼 수 없으며, 다가올 심판을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진리의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보게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참 죽음이 무엇인지를 보게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참된 의가 되시는 예수님을 보게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하게 합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 예수님을 떠나 사는 삶이라고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잘못된 부분을 책망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다시 예수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몇 일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봄이 자전거 사건입니다. 은규가 따던 자전거를 봄이에게 주었습니다. 봄이 자전거가 두 대가 되었습니다. . 은규가 따던 자전거가 더 새 거였고 좋았습니다.  집에 와서 보니까 봄이 자전거가 은규가 따던 것보다 더 컸습니다. 제가 브레이크도 손질하고 참 좋았습니다. 친구 딸 이레에게는 은규 자전거가 더 맞는 크기였지만 봄이가 따던 자전거를 주었습니다. 봄이가 새로 생긴 자전거를 잘 타고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바퀴가 전에 것보다 작아서 봄이가 속도를 내지 못했습니다. 봄이가 자전거를 바꾸고 싶어했고, 또 저도 작은 이레가 작은 것을 타는 게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뒤 바퀴의 바람이 조금 빠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약간씩 바람이 빠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제가 잘못을 했습니다. 바람을 넣어서 갔다 주고, 다시 봄이의 옛날 자전거를 가지고 왔습니다. 처음에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지만 그냥 말없이 건내주었습니다. 몇 일을 잊고 있었습니다. 이번 주 금요일에 우연히 이레네를 가게 되었는데 완전히 바람이 빠진 자전거를 보게 되었습니다. 다시 양심의 가책을 받았지만 모른척하고 집에 왔습니다. 속으로 바람을 넣으면 되는데.. 하면서 말입니다. 집에 오는데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어제 교회 행사를 마치고 밤에 집에 있는데 계속 바람 빠진 자전거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 내일 고쳐주자. 고쳐주면 되겠지... 모른척하고 선심을 쓰는 거야. 그러면 더 고마워 할거구.. 나는 부끄럽게 내 잘못을 말 안 해도 되고...” 정말 좋은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내가 꼭 거짓말을 하고, 어린 아이를 속이는 것 같은 양심의 가책이 있었습니다. 버티다가 밤 10시정도에 전화를 했습니다. 100%진실은 말하지 못하고, 95%정도의 진실을 말하면서 미안하다고, 일요일 오후에 내가 고쳐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이레에게도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양심을 조명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마음의 죄를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죄가 아니라, 빛 되신 예수님께 온전히 나오도록 돕는 분이십니다. 13절을 다시 읽으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정죄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진리 되시는 예수님께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크고, 넓고, 깊으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성령님은 늘 우리 안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살면서 느끼고, 만나고 경험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초대 제자들에게 임하셔서 일하셨던 성령님, 사도바울에게 임하셔서 예수님의 증거하셨던 성령님,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경험하고 함께 하셨던 성령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충만이 임하시기를 기대합니다.

늘 성령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성령님이 함께 계시기에 오늘도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과 늘 가까이 지내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