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순간 순간 선택을 해야 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밤에 잠에 들기까지 우리는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입어야 할지등 일상생활에서 매 순간 선택을 합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더 민감하게 선택을 해야 합니다. 말을 할때와 말을 하지 않고 침묵을 해야 할때, 말을 해야하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말은 하지 말아야할지를, 화를 내야할지, 화를 참아야 할지등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우리는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지나 날들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보다 이성적인 판단을 가지고 선택했던 시간도 있었고, 보다 감정적인 판단으로 선택을 했던 경험도 있습니다.  어떤 순간은 우리는 완고한 마음으로 선택하고 결정 해야 했던 순간이 있었고, 보다 유연한 마음으로 선택을 해야 했던 순간도 있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고집해야 할 때도 있었고, 나의 생각을 양보해야 하는 때도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형제자매님은 어떤 순간에 가장 완고한 마음으로 결정을 했습니까?

어떤 문제에는 보다 유연한 마음을 가지고 선택을 했습니까?

자신의 생각을 포기해야 할 때는 언제였습니까?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지켜야 할 때는 언제였나요?

 

이러한 선택은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가치관이 무엇인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고가의 사치품으로 나를 장식하기보다는 이웃의 아픔을 돌보고 나누는데 더 많은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선택의 기준은 사람이 우선시 될 것입니다. 만약 성공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는 성공할 수 있는 방법에 더 많이 관심을 두고 선택을 할 것입니다.

그 사람의 우선 순위가 돈에 있다면, 돈을 가장 먼저 생각하고 선택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조화롭게 살아가는 데에 마음을 두고 산다면 그 사람은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을 우선으로 하며 자신의 선택을 결정할 것입니다.

 

우리의 선택은 내가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고 있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어떠한 선택들을 해왔는지를 돌아보면 나의 가치관/ 내가 우선순시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형제자매님의 선택의 기준 혹 우선순위는 무엇이었습니까?

 

또한 우리는 소중하게 생각하고 우선시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우리는 완고하게 나의 것을 지켜야 할 때유연하게 나의 것을 양보해야 할 때를 분별합니다. 선택에 있어서, “완고함 (Inflexibility) 유연함 (Flexibility)” 은 모두 필요합니다.

 

바울의 선택에서 우리는 그의완고함유연함을 봅니다.  바울은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믿는 신념에도 무척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에서 그는 자신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전에 유대교에 있을 적에 행위가 어떠하였는가를, 여러분이 이미 들은 압니다.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하였고, 아주 없애버리려고 하였습니다. 나는 동족 가운데서, 나와 나이가 같은 또래의 많은 사람보다 유대교 신앙에 앞서 있었으며,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도 훨씬 열성이었습니다” (1:13-14).

 

그의 강한 성격의 또 다른 예는 바울이 그 보다 연장자였던 베드로 사도를 꾸중한 일입니다. 갈라디아 지역에서 베드로가 이방 그리스도인들과 함게 식사를 하다가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 신자들을 보고 그 자리를 피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바울은 그 자리에서 바로 베드로의 잘못을 지적하고 혼내기까지 합니다. 바울은 그가 옳다고 믿은 것에 따라 행동하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누구도 따라올 수없는 열정과 열심 그리고 강함이 그의 많은 삶에서 들어납니다. 이는 단지 율법을 따르고 지키는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가 다메석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후 그는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합니다. 사 십에서 한 대를 뺀 태형도 경험했고, 돌에 맞아 죽을 뻔도 했고, 굶기를 밥먹듯이 하는 고난도 경험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멈추지 않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열정과 강함이 그의 삶에 배여 있었습니다.   

 

그가 믿고 따른 것에 있어서 완고하고 강할 것만 같은 바울에게서 저는 새로운 모습, 바울의 유연한 선택 (Flexibility)”을 오늘 읽은 말씀에서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보여준 행동은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함께 사람들이 보기에는 의외의 선택입니다. 예루살렘 총회에서 할례에 대해서 그가 강하게 주장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합니다.

 

예루살렘 총회에서 돌아와 선교 여행을 떠난 바울은 루스드리라는 도시에서 할례를 받지 않은 예수님의 제자 디모데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합니다. 이는 바울이 일관성이 없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할례가 구원과 전혀 관계가 없다면 누구에게도 할례를 행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는 전혀 의미가 없는 의식이고, 행할 이유도 없습니다.

  

다시 한번 예루살렘 회의를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5 1-2절에서 보았듯이,  안디옥교회에서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이 된 이방사람들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할례을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가르치는 이 사람들에게 맞서 바울은 논쟁을 합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따르게 되면서 그가 성령을 통해서 깨달은 구원의 길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믿은 믿음의 은혜뿐이었습니다. 할례는 구원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서신서의 많은 곳에서 구원에 대한 그의 믿음 있습니다. 그 중 한 구절만 읽겠습니다. 갈라디아서 2:16,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로게 되는 것을 알고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바울의 할례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심각해지자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몇몇 사람과 함께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보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들은 구원과 할례에 대해서 많은 논쟁을 하게 됩니다.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에게 가는 동안 많은 생각과 질문들이 그 안에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예루살렘의 교회와 사도들이 구원에 관해서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바울 자신이 믿은 것과 다른 결정이 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다르다면, 교회의 회의의 결정을 따라야 하는가 아니면 예루살렘 교회와는 다른 길을 가야하는가? 다른 말로 하면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의 연합인가? 아니면 헤어져서 이방인 교회들이 독자의 길을 가는가?의 문제도 있었을 것입니다.

 

많은 생각을 하면서 바울은 자신에게 물었을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정말로 내가 양보하지 말하야 하는 본질적인 진리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진리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 나는 얼마만큼 양보를 해야 하는가? 예수님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바울 안에서 두 가지 중요한 신학적인 문제가 떠 오릅니다. 저의 관점으로는  가지는 바울 신학의 근간을 이루는 기둥입니다. 바울의 서신을 읽다 보면 바울은 끝임없이 기둥을 언급하곤 합니다.

 

하나는 구원에 대한 그의 신학입니다. 구원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구원을 얻는가?” 율법인가? 아니면 은혜인가?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누구보다도 더 율법에 열심히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을 행하는 길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길이라고 믿고 따랐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리스도 예수를 만난 이후 그의 구원에 대한 믿음은 변합니다. 율법이 아니라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은혜로 이루어 진다는 진리입니다. 2:8,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번째는 교회의 연합입니다. 바울은 교회에 대한 그의 신학을 자신의 모든 서신서에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인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어져가는 지체이다. 바울은 이 질문들에 대해서 확실하게 말합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믿는 사람들의 연합이다.

 

교회는 하나인가?”  그렇다면 교회의 연합은 중요한가? 질문에 있어서 바울은 우주적 교회, 하나의 교회를 말합니다. 지역에 교회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함께 모여 교회를 이룹니다. 하지만 흩어져 있는 교회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흩어져 있는 또 다른 교회들과 함께 연합되어 있다는 것을 바울은 말합니다. 바울의 이런한 믿음이 없었다면 그는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들과 함께 구원에 관해서 논쟁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자신들이 믿는데로 각자의 긷을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의 교회와 사도들에게 보냅니다. 이는 바울이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고, 교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연결되어져 있는 몸이라고 믿었고, 가르쳤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는 교회마다 성령 안에서 하나된 것을 힘써 지키라고 권하고 가르쳤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교회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바울에게 있어서 할례에 대한 논쟁은 매우 민감한 논쟁이었습니다. 교회의 연합에 위협이 있는 논쟁입니다. 예루살렘의 교회와 이방인들로 세워진 교회들이 서로 갈라질 있는, 깨어질 있는 긴장되는 순간입니다.

 

사도행전 15:7절을 보면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장로들이 모여 많은 논쟁을 했습니다. 이러한 논쟁 속에서도 사도 바울은 구원은 오직 은혜로 만 이룰 수 있다는 진리와 교회는 한 몸이라는 진리는 포기 할 수 없는 본질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도들과 장로들이구원은 할례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은혜으로 이룰 있다라고  결정 되었을때, 예루살렘의 총회에서 제안한 구원과는 상관 없이 다른 유대인들과의 관계에서 조심해햐 율법을 지키는 부분에 대해서 바울은 받아들입니다.

 

구원과 교회의 연합에 대한 진리는 사도 바울이 포기 없는 성경적 본질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이 구원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강하게 주장하였지만, 유대인들에게 다가가고 그들을 얻기 위해서는 율법을 지켜야할 필요성까지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본질의 문제에 있어서 포기 할 수없는 사람이었지만, 교회의 연합을 위해서는 자신의 주장을 포기 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완고한 사람(Inflexibility)이었지만 복음을 위해서는 유연한 선택을 한 사람(Flexibility)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복음을 위해서 보여준 바울의 유연함 (Flexibility)”를 볼 수 있습니다. 구원에 있어서 할례는 전혀 상관이 없다라고 가르치고, 그것을 위해 격한 논쟁을 했던 바울이 뜬금없이 디모데를 데려다가 할례를 줍니다. 디모데의 엄마는 유대인이고, 아버지는 그리스 사람이었습니다. 랍비의 가르침에 따르면, 디모데는 유대 사람인 엄마의 혈통을 따라서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그리스 사람이었기 때문에 디모데는 할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유대인이면서도 유대인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즉 디모데는 할례를 받지 않은 유대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이미 할례가 구원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는 전혀 의미가 없는 행위가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유대인 디모데를 데리고 가서 할례를 합니다. 그 이유를 3절에서 말합니다. “바울은 그 지방에 사는 유대 사람들을 위해서였습니다. 그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디모데의 아버지가 그리스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의 이러한 유연한 모습은 고린도전서9:19-22절에 묘사하고 있습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오대 사람들에게는 유대 사람을 얻으려고 유대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면서도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을 얻으려고 율법 아래 있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율법 안에서 사는 사람이지만 율법 없이 사는 사람들을 얻으려고 율법 없이  사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약한 사람들을 얻으려고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가운데서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는 강함을 벗어버리고 유연한 선택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마틴 루터는 오늘 읽은 본문을 주해하면서 바울에 관해서 이렇게 썼습니다. 바울은 믿음에는 강한 사람, 사랑 안에서는 부드러운 사람이다. 우리는 믿음에 관해서는 누구도 꺽을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수만 있다면 단단한 돌보다 단단해야 한다. 하지만 관용에 있어서는 우리는 부드럽고, 갈대보다 유연해야 하고, 모든 것을 양보할 준비를 해야 한다.” John Newtown 말하기를, “바울은 비본질에는 갈대였다. 하지만 본질에는 기둥이었다.”

 

우리는 바울의 완고한 믿음 유연한 수용력 봅니다. 분명히 유연성은 우유부단과는 다릅니다. 유연성은 우리가 진리에 대한 확고한 이해와 믿음이 있을 , 드러날 있는 포용력이고, capacity (수용력)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앞으로 우리는 교회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들을 함께 나눌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서 많은 생각들을 듣는 시간을 가질 것입니다. 때론 서로 너무 달라서 예루살렘의 회의처럼 심각한 위기에 직면 수도 있습니다. 때론 교회의 결정 아래에 나의 생각을 모두 내려 놓아야 고통스러운 시간도 있을 것입니다.

 

형제자매님이 목숨 걸고 지켜야할 진리는 무엇입니까?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가야 하는데 포기할 없는 본질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만약 제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이 교회 공동체를 몸으로 세우는데 방해가 된다면 저는 저의 모든 생각을 공동체의 결정 아래에 내려 놓을 것입니다우리는 나의 경험과 생각 그리고 자신의 신념이 아니라, 성경에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도들이 가르침,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우리의 모든 상처와 아픈  기억과 신념까지도 다 같이 내려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우리의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 완고 ( Inflexibility)해야 할때와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서 유연한 선택 (Flexibility)을 해야 할 때를 분별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2012년 한 해도 그동안 그리해 왔듯이  성령님의 인도에 더 민감하게 순종하는 저희가 되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