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한 현자의 이야기입니다. 인도의 현자 나라다는 하리 신을 섬기는 열심한 신자였다. 그는 신심이 어찌나 돈독하던지, 어느 날 그는 온 세상에서 자신이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더 자신의 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은 그의 마음을 읽으시고 말씀하셨다.

나라다, 갠지스 강변 마을에 가서 거기 사는 나의 열심한 신자를 만나라.

그와 더불어 사는 것이 네게 유익할 것이다.”

 

나라다는 마을에서 한 농부를 만났는데,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는 신의 이름을 단 한번 부른 다음 쟁기를 메고 들에 나가서 온종일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밤에 잠들기 적전에 신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불렀습니다.

 

나르다가 생각하기를.

어떻게 이 시골뜨기가 신을 열심히 섬기는 자란 말인가? 내가 보니 온종일 세상 일에만 골몰하고 있는데.”

 

그러자 하라 신은 나라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발에 우유를 넘치도록 가득 담아 들고 시내를 다 돌아다녀라. 그런 다음 한 방울도 흘리지 말고 돌아오너라.”

나라다는 하라 신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신이 나르다에게 물었습니다.

시내를 돌면서 걷는 동안 너는 나를 얼마나 자주 생각했느냐?”

 

신이여, 한 번도 당신을 생각하지 못 했습니다. 우유 사발을 지켜보라고 명령하셨는데 어떻게 당신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자주 나르다와 같은 실수을 범하고 있지는 않나요?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기에 바빠서 우리는 예수님, 그분을 잊고 살지는 않나요?

 

예수님보다, 그분의 명령에 마음을 빼앗겨, 진정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잃어버리고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날 교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보면서 인도 현자 나라다의 이야기가 생각이 났습니다. 일은 많이 하고 있는데, 정작 교회는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지 않는가? 예수의 이름으로 많은 일들은 진행되고 있는데, 정말 그 가운데 예수님은 계신 것일까? 수 천 억을 들여 교회 건물은 화려하게 짓고 있지만, 정말로 중요한 하나님의 마음은 놓치고 살고 있지 않는가?

 

이런 모습은 단지 다른 교회 만에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너무나도 쉽게 범할 수 있는 실수입니다. 제 자신이 저지르며 살고 있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서 열심을 냈는데, 정작 예수님을 잊고 산다면, 예수님의 마음을 모르고 산다면 우리의 수고는 헛 것이 됩니다.

 

성경에서 우리가 자주 보았고, 들었던 바리새인들의 실수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율법을 지키기 위해 정말로 열심을 내었지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잃어버리고 살았습니다.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하나님 마음 안에서 율법을 이해해야 되는데, 그들은 율법 안에 하나님을 가두는 실수를 범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주님만을 생각하고 살 자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서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일을 한다고 하지만, 자주 예수님을 문 밖에 세워두고, 우리 마음대로 일을 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예수님의 명령에 충실히 따랐지만, 예수님을 잊지 않고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사도행전 13장과 14장은 바울과 바나바의 일차 선교 여행의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안디옥 교회로부터 성령의 지시를 따라 파송 된 바울과 바나바는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14장의 마지막은 처음 출발한 안디옥 교회에 돌아와서 그 동안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이방인들에게 행하신 일들을 보고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의 보고를 듣고 기뻐합니다.

 

기쁨으로 충만했던 잔잔한 교회에 어느 날 갑자기 큰 파도가 칩니다. 몇몇 사람들이 유대에서 내려와 안디옥 교회에 말합니다. “여러분이 모세의 관례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잔잔하던 교회에 이주 큰 바위 덩어리를 던진 것입니다. 돌에 맞은 안디옥 교회는 혼란스러었습니다. 갑작스러운 말에 그들의 배움과 믿음에 의심이 들기 시작합니다. 정말 우리가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과 유대에서 내려온 사람들 사이에 충돌이 있었고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안디옥 교회는 성령님의 임재와 지시에 민감한 교회였습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던 안디옥 교회는 무력한 교회가 아니라 성숙한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이 문제로 분열되지 않았습니다. 그들 자신들의 생각대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생각과 다르다고 배척하지도 않았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자신들이 성령이 충만하다고 교만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에 이 이슈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로 결정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신도 몇 사람을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냅니다.

 

안디옥 교회의 성숙함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자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마음의 문을 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조언을 듣고자 하는 안디옥 교회의 자발적인 낮은 마음은 그들의 성숙함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숙한 교회는 절대로 자만하지 않습니다. 자신들만이 옳고, 선이라고 자신을 속이지도 않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도 않습니다. 성숙함은 서로에게 들으려는 마음을 통해 더 깊어집니다.

 

예루살렘에서도, 바리새파에 속했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이,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 이야기를 들고 있다가 이방 사람들도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도록 명하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도들과 장로들을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오늘은 예루살렘의 회의를 통해 갈등을 넘어서 하나로 나아가는 길을 찾고자 합니다. 우리는 갈등을 무서워합니다. 그래서 서로 다른 생각이 있을 때 말하지 않고 침묵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혹 갈등이 있을 때 우리는 이성적이 되기 보다는 감정이 먼저 앞서곤 합니다. 생각이 다를 뿐인데, “나를 미워하고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성령의 충만함으로 시작된 교회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처럼, 새로운 사람들이 몰려 올 때 늘 새로운 긴장이 형성되곤 했습니다. 사도행전6장에서는 히브리 말을 하는 제자들과 그리스 말을 하는 제자들 사이에 긴장이 있었고, 사도들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그리스 말을 하는 일곱 집사를 세우면서 교회 안에 있었던 긴장과 갈등을 해결했습니다.

 

오늘의 문제는 보다 더 심각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넘을 수 없는 어떤 벽에 도달한 것입니다. 하지만 언젠가 한번쯤은 넘어야 하는 벽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지옥의 땔감처럼 여겼습니다. 하지만 초대 교회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방인들을 전도했고,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드렸습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들을 선교하는데 선봉에 섰고, 많은 이방인들과 함께 교회를 세웠습니다. 예루살렘의 사도와 장로들도 이 소식을 듣고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초대 교회 안에서 이방인들이 교회에 들어오는 것은 찬성하는데, 먼저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특별히 바라새파에 있다가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은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지 않고 함께 식탁에 앉아 형제자매의 사랑을 나누는 것에 크게 불만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단지 소수의 사람들만의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울이 베드로를 크게 비판한 사건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예루살렘에서 몇몇 사람이 오자, 할례 받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그 자리를 떠나 물러난 일입니다. 유대인들는 무할례자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고, 자신을 더럽히는 행위처럼 여겼기 때문입니다. 비록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유대인에게 남아 있는 율법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는 넘지 못하는 벽이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함께 예배는 드릴 수 있는데, 함께 음식은 먹을 수 없습니다. 이방인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둘러 앉아 음식을 먹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성만찬을 함께 하면서 떡과 포도주를 서로 나누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마치 이성애 자들과 동성애 자들이 함께 예배 드리는 것이 부담스럽고, 아니 교회에 오는 것까지는 허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동성애자들과 한 형제자매로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것처럼, 유대인들과 헬라인들 사이에는 아주 높은 벽이 있었습니다. 아마 오늘 날 이성애자인 우리가 동성애자들을 대하는 태도 혹은 생각과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가졌던 태도와 감정이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방인 신자들이 교회에 몰려오면서 율법이라는 새로운 이슈가 수면 위로 올라왔습니다. 잠재되었던 갈등이 밖으로 표출 되었습니다. 6장에서는 그리스 말 하는 유대인들의 서운함에서 표출 된 갈등이라면, 15장에 나타난 갈등은 보다 더 신학적인 이슈가 있습니다. 구원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예민한 이슈입니다.

 

이 문제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인 교회와 이방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가 하나의 교회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갈라져서 각자가 옳게 생각하는 대로 제 갈 길을 가는가 하는 심각한 이슈입니다. 큰 위기의 순간입니다. 어쩌면 기득권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포기할 수 없는 기득권을 이 순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고집할 것인가?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이런 심각한 문제가 우리 안에 일어났을 때 우리는 어떻게 갈등을 다루어야 하는가?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갈등이 없을까요? 아니요. 있습니다. 사람이 모인 곳에는 늘 갈등과 긴장은 존재합니다. 하지만 갈등을 두려워한다면 우리는 서로를 더 깊이 알아갈 수도 없고, 더 건강한 교회로 세워져 갈 수 없습니다. 물론 갈등은 우리로 하여금 힘든 시간을 보내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심하면 갈라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갈등을 해결해 가는 우리의 태도와 과정에 따라 우리에게 더 성숙한 교회로 나아갈 수 있는 긍정적인 기회로 작용을 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 나타난 예루살렘 회의를 통해서 우리는 갈등을 풀어가는 몇 가지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의 초점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인가? 예수님이 명령인가? 하나님인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인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대답할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의 초점은 예수님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쉽게 일 중심으로 빠지기 싶습니다. 앞에서 읽은 인도의 현자처럼, 주님이 명령한 일에 신경을 쏟느냐고 주님을 잊고 사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선교와 교회 성장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진정 하나님은 잊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에 초점을 두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사랑의 삶을 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난 주와 연결됩니다. 하나님, 예수님에게 마음을 두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명령, 혹은 율법에 마음이 뺏긴 사람들은 사람이 아니라, “, 생명이 없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실수를 범하곤 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수 많은 일들 안에서 생명의 소중함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바리새파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방인들이 교회에 오는 것은 좋은데, 먼저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마음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율법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 한 것입니다.

 

형제자매님, 늘 예수님을 마음에 품고 살기 원합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품는 다는것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늘 알아가는 것이고, 예수님의 삶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큰 일을 이루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예수님의 명령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정말로 닮아간다면, 예수님의 명령은 강요 안 해도 이루더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내 안에서, 우리 안에서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 일/사역/혹은 지상 명령이 아니라,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고 삽시다. 영이신 그분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서 성육신하신 몸으로 살아가도록 말입니다.

 

두 번째는 갈등이 있을 때 사람과 갈등을 동일하게 보지 말아야 합니다.

갈등과 사람을 따로 분리 할 수 있는 이성적인 태도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자주 사람과 문제를 동일시 하곤 합니다. 나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은 마치 나를 싫어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다른 의견으로 갈등이 생기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감정의 골이 생깁니다. 감정의 골은 메우기가 참 어렵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갈라지는 이유 중 하나는 생각이 달라서라기 보다는 다름에서 생긴 감정적 골이 더 깊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시 예루살렘의 회의를 봅니다. 2절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과 유대에서 온 사람들 사이에 적지 않은 충돌과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7절에도 많은 논쟁을 한 뒤에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충돌도 하고 많은 논쟁을 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갈라지지 않고, “하나됨의 길을 선택합니다. 하나됨의 길은 사람과 갈등을 떼어 놓고 보는데서 시작됩니다.

 

이슈와 사람을 동일시 하지 않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감정적인 태도 보다는 이성적으로 갈등을 다루어야 합니다. 만약 현준 형제와 제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로를 설득하기 위해 적잖은 논쟁을 합니다. 교회  안에 저의 의견과 현준 형제의 생각을 지지하는 그룹이 생깁니다. 이제는 일대일이 아니라 그룹과 그룹 사이의 논쟁이 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이 아니라 갈등의 원인에 집중하는 태도는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지혜와 여유를 우리에게 줍니다. 15장은 아주 짧게 요약되었지만, 사람을 비난하기 보다는 문제에 초점을 두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열었습니다. 중요합니다.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까지 미워하면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열 여유가 없습니다.

 

많은 논쟁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서 말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않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이방인들에게 하신 일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마음, 즉 유대인과 이방인 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을 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그들이 논쟁 속에서 사람이 아니라 이슈를 보았을 때 이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자신의 생각을 말합니다. “10-11절입니다.”

 

바울과 바나바 이방인 선교에 있어서는 자신들의 생각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논쟁의 중심에 있었고, 자신들의 가르침과 일을 방어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의 옳음을 주장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들도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고, 단지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이방 사람들에게 행하신 일들을 이야기 합니다.

 

야고보도, 일어나서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는 아모스 선지자의 말씀을 읽습니다. 16-18절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제안합니다.

 

논쟁 속에 있던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과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진 말씀을 통해 해결책을 찾게 합니다.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훈련이 필요합니다. 나의 생각을 표현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나와 다른 의견을 듣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문제와 사람을 따로 바라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다른 생각을 들을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나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다름을 인정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나의 생각에 사로잡혀 성령이 교회에 하는 음성을 듣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쉽지 않지만 논쟁 속에서도 성령의 음성에 마음을 여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모두가 하지 못한다 해도, 우리 중에 누군가는 깨어 있어서 논쟁의 파도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성령의 음성을 들 을 수 있는 형제자매가 있어야 합니다. 형제자매님이 바로 그 누군가가 되어 주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는 듣는 귀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성향은 자꾸만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기를 강하게 갈망합니다. 내 의견이 상대방의 의견보다 더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기를 기대합니다. 당연합니다. 하지만 들을 수 있는 귀가 필요합니다. 나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을 수 있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논쟁을 하다 보면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의 말을 중간에서 끊고 내 생각을 말하고 싶은 유혹이 참 많습니다. 급한 사람은 상대방의 말을 끊고 자신의 다른 의견을 말합니다. 화가 납니다. 때로 의견이 달라서가 아니라, 말하고 있는 중간에 끊고 들어와서 다른 말을 하는 상대방이 미워서 더 화가 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들음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들을 수 있는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서로를 진지하게 들을 때, 나와 상대방의 태도가 변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나의 말을 듣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면 서로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상대방이 나의 말을 듣고 있을 때 논쟁은 이제 이야기로 승화되고, 그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서로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는 자주 논쟁에서 끝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갈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논쟁에서 이야기로 발전해 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많은 논쟁을 한 뒤에, 논쟁을 듣고 있던 베드로가 일어나서 이야기를 합니다. 자신 경험한 이방인들에게 일하신 하나님의 이야기를 합니다.

 

논쟁의 한 가운데 있었던 바나바와 바울 두 사람이 베드로의 이야기가 끝난 뒤 일어나 자신들을 통해 일하신 하나님의 이야기를 합니다. 논쟁은 이제 하나의 이야기, 하나님의 이야기로 발전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듣는 인내를 통해서 우리의 논쟁이 이야기로 변해가는 시간을 주어야 합니다. 서로의 이야기가 있을 때, 논쟁은 멈추고 우리는 동일한 이야기 속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바로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누군가가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들어줄 때 나의 말은 큰 이야기의 일부가 됩니다. 들어 주십시오. 누군가가 나와는 전혀 다른 의견을 말할 때, 너무나 어쩌구니 없는 말이라고 생각이 들더라도 중간에 끊지말고 끝까지 인내하며 들어주십시오. 들어줄 때 논쟁은 우리의 이야기가 되고, 나아가서 하나님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논쟁 속에서도 기억해야 하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함께 예수의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나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됨을 위해 부른 받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소명은 나의 좋은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온전한 몸을 이루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에베소서 4장에서 바울은 교회에 권합니다. “겸손함과 온유함으로 깍듯이 대하십시오. 오래 참음으로써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십시오.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입니다.”

 

하나가 되고자 하는 갈망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는 나의 생각을 포기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수용하고, 공동체의 결정에 따를 수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회의에서 할례와 구원에 대한 논쟁에 대한 한 해결 방안이 채택되었습니다. 야고보가 제안합니다. 유진피터슨의 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우상과 관계된 활동에 관여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성생활과 결혼의 도덕을 지키며, 듀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거슬리는 음식-이를 테면 피 같은 것-은 내놓지 마십시오. 이것은 모세가 전한 기본 지혜입니다.”

 

그리고 사도와 지도자와 모든 사람들이 야고보의 제안에 동의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몇 사람을 대표로 안디옥 교회에 편지와 함께 보냅니다. 회중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온 편지를 읽고, 그 권면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구원은 예수의 은혜만 이루어진다는 일치점을 찾습니다. 그러나 이방인 신자들에게 유대인들을 위해 조심해야 할 몇 가지를 알려줍니다. 모두가 이 제안을 수용합니다.

 

말씀을 정리하며, 우리는 우리가 이루어야 할 큰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 초점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정말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를 늘 물어야 합니다. 일이 아니라 사람을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갈등이 단지 논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로,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이야기로 승화되도록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들어야 합니다. 들음은 배우는 것입니다. 서로를 듣은 연습을 우리는 해야합니다. 늘 우리가 품어야 하는 마음은 어떤 큰 일을 이루느냐가 아니라, 온전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하는가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