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계신 하나님 (living God)

 

사도행전 14장을 읽으면서 제 눈과 마음을 사로잡은 구절은 15, 특별히 살아 계신 하나님입니다. 영어 성경 NIV를 찾아 보면, 구약과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을 “living God”로 부르는 구절이 28번 나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우상과 하나님의 차이는 생명있느냐,” “없느냐에 있었습니다. 모든 우상은 죽은 즉 숨을 쉬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헛된 신이었고, 하나님만이 생명이 있고, 우주의 시작이 되시고, 인간에게 호흡을 주신 참 신이었습니다.

 

성경에서 몇 구절을 찾아 보았습니다.

신명기 5:26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불 가운데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여호수아 3:11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당신들 가운데 계셔서.. 사무엘 상 17:26,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군인들을.. 열왕기하 19:4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욕하려고.. 시편 42:2 내 영혼이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하니..  예레미야 10:10 오직 주만이 참되신 하나님이시요, 주님만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며 다니엘 6:20, “살아계신 하나님의 종 다니엘은 들으시요 사도행전 14:15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4:11 “살아계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므로….

 

우리의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반응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무릎의 신경이 잘 살아있나 보기 위해 망치로 무릎을 쳐보잖아요. 신경이 살아 있으면 무릎이 반응을 합니다.  작대기를 땅에 던지면 전혀 반응이 없습니다. 그냥 땅바닥에 떨어져 뒹굴기만 합니다. 살아 있는 개를 땅에 던지려 하면, 안 떨어지려고 몸부림 칠뿐만 아니라, 땅에 떨어지면 아프다고 신음소리를 냅니다. 반응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생명이 가진 특징 중 하나는 생명과 생명은 서로간에 interaction 즉 상호 관계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생명이 만나,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합니다. 수컷과 암컷이 만나,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합니다. 나무도, 식물도 암수가 만나 열매를 맺고, 씨를 남깁니다. 살아 있는 생명은 또 다른 생명과 끊임없이 관계를 이루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의미는 살아있는 생명 세계와 끊임없이 관계-interaction-를 한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움직임에 반응을 하신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지으신 이 우주를 관망하는 신이 아니라, 그 안에서 호흡하고, 그 안에서 말씀하고, 그 안에서 사랑을 나누신다는 의미입니다. Living God은 내가 부를 때 반응하시는, 응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시고, 하나님이 호흡을 주신 바로 우리, 나와 늘 함께 계신다는 고백이 즉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가운데 지금 계십니다.

 

슬프게도 살아 계신 하나님이란 구가 교회의 역사에 악용되었던 경우도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심문하던 대제사장들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를 심문했습니다. 마태복음 26:63, “대제사장이 예수께 말하였다. “내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걸고 그대에게 명령하니, 우리에게 말해 주시오. 그대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요?” 기독교의 긴 역사 속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한 수 많은 악들도 있습니다. 입으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말하지만,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일들을 교회는 자주 해오곤 했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그를 따르는 백성들에게는 아주 친밀한 하나님, 그들과 함께 사시는 하나님을 나타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힘있는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선동의 도구가 되기도 했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저런 일을 할 수 있을까?라고 반문할 수 밖에 없는 일들이 교회역사 안에서 일어났고, 오늘 날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을 살아 계신 하나님, 우리와 함께 호흡하며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와 함께 사시는 하나님을 믿는 다면, 우리의 삶의 선택은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정말로 교회가 힘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면 세상은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아 왔다면 우리의 삶, 그리고 이웃의 삶은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상을 호령하는 자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자들이었다면 교회는 지금 이렇게 무너져 가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의 이름은 사람들에게 멸시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부르는 우리는 바로 그분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부르는 우리는 그분의 마음을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부르는 자들의 삶의 모습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요?

세 개의 짧은 묵상으로 나누고자 합니다. 

 

   

1.    기쁨을 주는 자 VS 시기하고 선동하는 자

사도행전 13 14장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상황이 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회당과 마을에 들어가서 예수님의 복음, 하나님의 은혜를 전합니다. 그러면 어김없이 유대인들이 와서 훼방을 놓습니다. 13 46절을 보면, 유대 사람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심으로 가득 차서, (여기서 그 무리는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 예수님께로 돌아온 자들을 말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한 말을 반박하고 비방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50, “유대 사람들은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 지도층을 선동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였고, 그들을 그 지방에서 내쫓았다.” 14장에도 계속적으로 유대 사람들이 사람들을 선동해서 바울과 바나바에게 나쁜 감정을 가지게 하고, 결국은 돌로 바울을 치기도 합니다. 

 

시기와 질투 우리 다 합니다. 사람이기에 시기 할 수 있습니다. 질투할 수 있습니다. 살아오시면서 한번도 시기와 질투심으로 다른 사람을 미워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나요?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성자입니다.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 이기에, 오늘도 여전히 누군가를 질투하고 시기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내 안에 있는 질투심과 시기심으로 고민하고, 나의 연약함을 고백한다면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처럼, 시기심으로 다른 사람을 비방하고, 또 선동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나쁜 감정을 갖게 하고 폭력을 행하게 하는 자들이라면,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함께 사는 자들이 아닐 것입니다. 단지 그분의 이름만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연약함을 하나님 앞에서, 형제자매 앞에서 고백하는 자들이고, 끊임없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형제자매님 강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지 맙시다. 그냥 연약함 그대로 하나님께 나가고, 서로에게 나갑시다. 나의 연약함을 숨기려고 강한 모습을 자꾸 입으려 할때 우리는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나를 방어하려는 강한 옷을 벗어버리고, 연약한 옷을 입읍시다. 우리 안에 시기와질투가 일어날 때 마다, 그 사실을 부인하지 말고,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그 연약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발견하며 살기를 기대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할 때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 안에서 성령이 주시는 기쁨을,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그 기쁨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2.    둘이 함께

바울과 바나바가 늘 동행을 합니다. 혼자가 아니라 둘이서 함께 다닙니다. 사도행전 15장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헤어진 뒤에도, 16장 이후 선교 여행을 할 때도 바울과 실라가 늘 함께 가고, 바나바와 마가가 함께 떠납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말 주변이 좋고, 병자를 고치는 기적을 행했던 바울이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라 늘 누군가와 함께 동행을 합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보낼 때 두 명씩 짝지어서 보내셨습니다. 혼자가 아니라 늘 누군가와 함께 동행하는 삶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8:19-20, “내가 거듭 너희에게 말한다. 땅에서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합심하여 무슨 일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자리, 거기에 내가 그들 가운데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 세 사람이 함께 하는 삶을 격려합니다. 혼자 있는 곳이 아니라 두 세 사람이 모여 있는 자리에 예수님이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다 알 수 없지만 둘이 함께 있는 신비가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부모를 떠난 한 몸을 이루는 신비가 있듯이 말입니다.

 

분명 둘이 함께 하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발견하는 축복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함께 있을 때 우리 안에 있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발견하는 은혜 말입니다. 특별히 부부는 함께 하나님을 만나는 아주 특별한 관계입니다.  

 

둘이 함께 하는 의미를 최근에 경험해 보았습니다. 자폐청년 토니와 함께 지낸 지 한 달이 되어갑니다. 사실 토니는 함께 있으면 신경을 써야 하는 형제입니다. 어떻게 보면 제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존재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밤에 누군가가 집에 침입하면, 혹 불이라도 나면 토니는 나에게 짐이 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둘이 있는 것이 제게 손해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한 달을 토니와 살면서 둘이 함께 있는 것이 단지 도움을 주고 받은 의미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늘 나보다 나은 사람을 친구로 두고 싶어합니다. 어른들도 될 수 있으면 너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을 만나라고 말하곤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도움이 필요할 때를 위해서 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함께 한다는 의미와는 다른 것입니다. 함께 한다는 의미는 전혀 다른 기쁨을 줍니다. 토니가 함께 있다는 그 사실이 그냥 힘이 되었습니다. 감정적으로 제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밤에 잘 때 나의 보호가 필요한 연약한 토니가 함께 있다는 사실이 저에게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이곳에 계시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상하죠. 강한 사람이 아닌데.. 나에게 도움을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 그냥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큰 위로와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함께 하는 삶 그 자체가 기쁨과 아름다움, 그리고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주고 받아서가 아니라, 함께 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충분이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3.    기적을 쫓을 것인가? 사랑을 하며 살 것인가?

 

3절을 읽게 습니다. “두 사도는 오랫동안 거기에 머물면서, 주님을 의지하여 담대하게 말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손으로 표징과 놀라운 일을 행하게 하셔서, 그들이 전하는 은혜의 말씀을 확증하여 주셨다.”

 

바울과 바나바는 행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데 사람들이 잘 믿지 않을까 봐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서 기적과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이 전하는 은혜의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확증해 주십니다.

 

이런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정말로 좋을 까요? 진짜로 좋을까요? 좋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적은 잠깐입니다. 기적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기적은 또 다른 기적을 요구합니다. 유대인들 예수님의 수 많은 기적을 보았지만, 예수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돌아온 자들 중에는 물론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예수님의 사랑을 맛본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열명의 문등병자들 예수님이 고쳐 주셨지만, 단 한 사람만 예수님께 돌아 왔습니다.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닦았던 마리아, 창녀였을 거라는 추측도 있는 여자지만, 예수님의 사랑을 맛본 그녀는 예수님이 죽는 십자가 앞까지 따라옵니다. 기적을 맛본 자는 떠 날 수도 있지만, 사랑을 맛본 사람은 떠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전하는 예수의 복음이 참 진리라는 것을 확증하여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기적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무엇으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인 이라는 것을 증명하시겠습니까? 무엇으로 여러분이 전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 할 수 있습니까? 기적입니까? 소유입니까? 번창하고 있는 사업입니까? 자녀가 유명한 대학에 들어간 것입니까? 성공입니까?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왜 사랑만이 우리가 전하는 예수님을 확증할 수 있나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한 대상이 있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을 사랑하라.” 두 번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세 번째 원수를 사랑하라.” 네 번째 네 아내를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사랑입니다. 생명이 있는 사람, 살아 계신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랑이 있는 곳에, 사랑이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할 때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거짓이 됩니다. 우리가 전하는 예수님은 거짓이 됩니다. 무서운 말입니다. 일을 너무 사랑해서 가족을 희생할 때, 아니면 누군가를 희생시킬 때 우리는 예수님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어서, 다른 사람을 보지 않고 달린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2년 전인가요. 이명박 대통령이 장관으로 내정한 사람 중에 소망 교회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분이 땅 투기 의혹이 불거졌을 때 해명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땅을 너무 사랑해서…” 아마 그 분이 땅이 아니라 사람을 사랑했었다면, 더 좋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사람을 더 사랑했다면 부모를 잃을 두 아이의 땅을 싼 값에 사서 다섯 배 정도의 불의한 이득을 챙기지는 안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예수님의 복음이 거짓이어서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해 하는 대상인 사람이 아니라 생명이 없는 물질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사람, 사랑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검은 머리를 가진 동물 사람을 더 사랑하고 살았다면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람을 구원하는 능력으로 선포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만 착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돈, 물질, 권력, 성공, 이런 생명이 없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드러내고  증거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 힘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고 너나 잘 살아라 말하는 것입니다. 왜 선교지에서는 놀라운 구원의 일들이 일어납니까?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왜 오늘날 서구에서는 화려하고 큰 교회와 예배가 수 없이 드려지는데도 자꾸만 복음의 능력을 상실하고 있습니까? 생명이 없는 것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합시다. 이웃을 더 많이 사랑합시다. 원수를 더 많이 사랑합니다. 원수 같은 자식을 더 많이 사랑합시다. 아내를 더 많이 사랑합시다. 남편을 더 많이 사랑합시다. 사람을 다른 그 무엇보다 더 많이 사랑합시다.

 

하나님의 사랑을 정의 한다면, 자신을 비우고 상대방으로 자신을 채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보여 주신 사랑입니다. 빌립보서27절에서 바울이 표현한 사랑입니다. “오히려 자신을 비워서 종의 모습으로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자신을 완전히 비우시고, 전적으로 사람과 같이 되셔서 우리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자기를 비워서 사람으로 당신을 채우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자꾸만 내 자신으로 나를 채우고, 나의 욕심으로 채우려 하기 때문에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내 욕심으로 상대방을 채우고 싶고, 변화시키고 싶고, 다스리고 싶기 때문에 사랑할 수 없습니다. 아니 그것이 사랑이라고 자주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스스로를 비우시고, 사람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사람이 당신 안에 있는데 어찌 그들의 아픔이 하나님의 아픔이 되지 않을 수 있고, 그들의 고통이 어찌 하나님의 고통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아파하셨고, 눈물 흘리셨고, 슬퍼하셨고, 때론 한탄하셨고, 웃으셨던 것입니다.

 

자신을 비우고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이 어찌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내가 나를 비우고 다른 사람으로 나를 채운다면 어찌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 사람의 아픔의 나의 아픔이 될 수 밖에 없고, 그 사람의 배고픔이 곧 나의 배고픔인데, 어찌 그냥 바라만 볼 수 있습니까?

 

마터 테레사 수녀가 자신을 비우고 인도의 가난한 자들을 마음에 품었기에 끝없이 그들을 사랑할 수 있었고, 자신을 비우고 수단의 작은 마을 톤즈의 가난한 사람들을 자신으로 받아드렸던 이태석 신부님의 사랑이 바로 자신을 비우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들은 신비한 기적이 아니라 자신을 비우는 사랑으로 그들이 전한 복음이 진리라는 것을 보여주었던 분들입니다. 나의 욕심을 비우고, 자녀를 그대로 바라본다면, 나의 욕심을 버리고 타인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받아드린다면 우리는 사랑하며 살 수 있습니다.

 

형제자매님, 기적을 쫓는 자들이 아니라,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이 됩시다. 기적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 사는 자들이 됩시다. 그래서 우리가 전하는 예수님의 복음이 진짜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확증합시다. 우리의 주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그 하나님처럼 사랑하며 삽시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만 부르지 말고, 그분의 마음을 알아가며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