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6일에 제가 나누었던 말씀 나눔 내용입니다.


제목: 99마리의 양
본문: 마18:12-14
참고: 눅15:3-7, 8-10, 11-32

오늘 본문 말씀은 잃어버린 한마리 양에 관한 예수님의 유명한 비유입니다. 말씀 나눔
제목에서 눈치 채셨겠지만 저는 오늘 한마리 잃어버린 양이 아니라 들에 남겨진 99마
리 양에 관해 나눌까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한마리 잃어버린 양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들에 남겨
진 99마리 양에 속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언제인가 부터 저는 이 본문을 읽으면 거의 항상 이런 상상이 떠 올랐습니다. 들에는
99마리의 양이 남겨져 있고 그 속에 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금방 오실 것 같던 주인님
은 해가 지고 깜깜한 밤이 되었는데도 오지 않고 저를 포함해 들에 남겨진 99마리의
양들은 불안과 초조가운데 주인님을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어쩌면 아직도 가끔씩 생각나는 어릴적 기억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제가 국민학교 2학년때 일이었던것 같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니 집에는 동생만 있고 부엌에서는 한솥 가득 채워진 물이 끓고 있었습니다. 어린 생각에 끓는 물을 그냥 두면 안될것 같아 그 물을 내리다가 그만 끓는 물을 제 발위에 쏟고 말았습니다. 두 발은 심한 화상을 당했고 어린 동생은 옆집 아주머니에게 도움을 청하러 울며 뛰어가고... 울다가 잠이 들었다가 또 울다가 하며 어머니가 오시기를 기다리던 그 시간은 참으로 길었던것 같습니다.

저만 이런 이상한 생각을 한건지 다른 분들도 같은 의문을 가져보신 적이 있는지 궁금
하네요. 혹시 이 본문을 읽으시면서 들에 남겨진 99마리 양들은 어떤 마음이었
을까 궁금해 하신적이 있으신가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평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
었을까요? 아니면 제 상상 속처럼 불안에 떨고 있었을까요? 아니면 그깟 한마리 찾으
려고 우리를 이런 험한 곳에 버려두었다고 투덜거리고 있었을까요? 아니면 부모의 마
음을 잘 헤아리는 큰딸 같은 마음으로 목자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목자가 그 잃어버린
양을 찾아 오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을까요?

누가복음 15장에도 동일한 비유가 적혀 있습니다. 제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3절 -
7절 까지 말씀입니다. 누가는 매우 논리적인 사람이었던것 같습니다. 15장에는 예수님
의 비유 세개가 적혀 있는데 모두 잃어버린 영혼에 관한 비유입니다.

1-2절: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이유: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며 죄인을 경
멸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아버지의 마음을 가르치시는 예수님

3-7절: 100마리 양의 비유

8-10절: 열 드라크마 비유

11-32절: 탕자의 비유

이 세 비유의 공통점: 잃어버리고 => 찾고 => 잔치

그런데 탕자의 비유에는 다른 두 비유에 나오지 않는 두가지가 더 있습니다.
첫째는 아버지 집에 남아 있던 형의 마음 입니다. (28-30절)
둘째는 그 형에게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 입니다. (31-32절)

28절 - 30절에 나와 있는 형의 마음입니다.
들에 남겨진 99마리의 양의 마음도 이런 형의 마음과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바보같이
제대로 뒤 따라 오지도 못하고 길을 잃어버린 그런 쓸모없는 녀석 하나 때문에 어떻게
목자는 우리를 이 위험한 들 한 복판에 남겨두고 갈수 있을까? 왜 저런 말썽꾸러기 녀
석 때문에 내가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거야?

이번에는 31-32절에 나와 있는 아버지의 마음을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해 달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지 않습니까?
- 잃어버린 양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도 있기를
- 잃어버린 양을 걱정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도 있기를
- 그래서 아버지가 잃어버린 그 양을 찾아 돌아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며 기꺼운 마음
으로 불편함과 두려움을 참아내기를
- 잃어버린 양을 찾았을 때 진정한 마음으로 함께 기뻐하며 잔치에 참여하기를

최영모 형제님께 지난주 주보에 나왔던 고백을 이번 주에 한번 더 실어 달라고 부탁했
습니다. 그 고백의 마지막 부분을 제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동안 우리는 가끔씩 어쩌면 생각보다 자주 들판에 남겨지게 될겁니다. 그
때 아버지가 우리 자녀들에게 원하시는 마음이 이런 마음이 아닐까요?

그 고백을 제 낮은 수준에 낮추어 바꿔 본다면 뭐 이정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 잃어버린 영혼을 찾을수만 있다면 난 어떻게 되어도 괜찮아요.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라면 난 아무렇게나 되어도 괜찮아요.

얼마전 성경 공부 시간에 제가 십여년 전에 신문에서 읽었던 기사를 나눈적이 있습니
다. 어떤 40대 아주머니가 새벽 기도를 가다가 길거리에서 강도를 만나 강간을 당한
사건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수 있을까 하는 저의 질문에 함옥련 자매님
이 '그게 왜 이상하죠? 당연한거 아닌가요?' 라고 하셨습니다. 전 순간 많이 당황했습
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며칠을 두고 생각을 했습니다. 맞다. 내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런 일이 내 이웃이 아닌 나에게 일어나는 것을 당연히 여겨야 하는데 나는
왜 아직도 하나님이 나를 걸음마 아기로 대우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을까? 여러분 혹시
그게 왜 당연한 일인지 이해가 안되시는 분이 계십니까? 이해는 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으신 분은 안계신가요?

그 아버지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시는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대낮에 수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강간을 당하는 것보
다 더 큰 모욕을 기꺼이 받으셨습니다. 아버지가 안타깝게 찾고 있는 잃어버린 양을
구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중보자의 마음입니다.

99마리 양중에는 아직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 양도 있을 것이고 한참 사춘기를 겪고 있
는 양도 있을 것이고 아버지를 대신해서 다른 양들을 보살피며 스스로를 희생해야 할
맏이 같은 양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큰 형이 되서도 툴툴 거릴줄만 아는
큰 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한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아 떠나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해 달라고. 실컷 방탕하다 돌아온 동생을 기쁘게 맞아 달라고. 아버지의 기쁨에
함께 참여해 달라고.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기꺼운 마음으로 따라 걸어가 주겠냐고
물어 보시는 것 같습니다.

형제 자매님,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갈 준비가 되셨습니까? 그렇게 살고 싶
은 갈망이 있으신가요? 한국 부모님들의 아킬레스건은 자녀이지요? 그래서 십자가의
요한의 고백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보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지 한번 점검해 보시길 바랍니다.

- 예수님, 은혜를 베푸셔서 이런 갈망을 갖게 하소서
- 다른 사람의 자녀가 저의 아들 보다 더 존중 받기를 바랍니다.
- 세상의 기준에서 다른 사람의 자녀들이 더 높아지고 저의 딸이 더 낮아지기를 바랍
니다.
- 다른 사람의 자녀들이 선택되고 저의 아들은 제외되기를 바랍니다.
- 다른 사람의 자녀들이 칭송받고 저의 딸은 주목 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 저희의 아들과 딸 들이 잃어버린 영혼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희생할수 있기를 갈망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