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름!

 

우리는 이 말을 은유적으로 많이 사용하곤 합니다. 하지만 목마름은 내적인 갈망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몸이 생명을 향한 투쟁적 갈망이기도 합니다. 목마름은 실제적 삶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도전입니다. 삶의 순간순간 우리는 목마름에 지치곤 합니다. 누군가가 아니면 어디에선가 이 목마름을 채울 수 있기만을 바라며 때론 현실을 원망하기도 하고, 때론 누군가를 미워하기도 합니다.

 

목마름은 우리가 매일 겪고 있는 삶의 현실이고 실재입니다. 목마름은 우리에게 고통의 순간이며 혹은 죽음의 두려움에 직면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자꾸만 말라가는 아프리카 사막, 코끼리는 물을 찾아 수백킬로미터를 걷는 다고 합니다. 이처럼 목마름은 실제적 삶에서 생명에 대한 갈망이기도 합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또 다른 목마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하나님을 찾는 갈망을 메마른 땅에서 물을 찾은 그 갈급한 마음으로 표현합니다. 물을 찾지 못하면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그 간절함이 시편 기자가 주님을 찾은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떠한 목마름이 있습니까? 현실의 삶에서 우리가 겪는 목마름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말라가는 사막에서 물을 찾아 나서는 코끼리들처럼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합니까?

 

오늘 읽은 본문은 목말랐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사막에서 목마름에 물을 찾던 이스라엘의 사람들, 사람들의 낮을 피해 뜨거운 대낮에 물을 위해 우물에 찾아온 여인,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여행을 하다 목마르고 치쳐 우물가에 쉬고 있는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물이 없어서 죽음의 두려움에 대면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르비딤이라느 곳에 텐트를 쳤는데 그곳에는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갑자기 두려워집니다. 물이 없는 이곳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 수 있을까? 마실 물이 없는데 우리의 자녀와 가축은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지금 이들이 대면하는 목마름은 생존의 문제가 달려 있습니다. 죽음과 삶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사막 한 가운데 우리 교회 식구들이 텐트를 쳤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마실 물이 전혀 없습니다. 물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아이들은 목이 마르다고 아우성칩니다.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우리들 사이에 불평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누가 이곳에 오자고 했냐? 왜 이곳에 와서 우리가 물이 없어 죽어야 하는가? 당신은 왜 우리를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이곳으로 인도했는가? 끊임없는 불평이 우리 안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돌보심을 신뢰하며 평화를 잃지 않는다면 우리는 대단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럴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대면한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만 않습니다. 사막에서 물이 없다는 것은 죽음과 삶의 갈림길에 서 있는 상황입니다. 이들 사이에도 불평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데 하느냐?”

 

이들은 자신들의 생존에 대해 불확실성 앞에 두려운 것입니다. 이들은 단지 물을 마실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곳에서 살아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에 부닥친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이들이 묻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어쩌면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를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비웃을지도 모릅니다. “너희를 인도해 내신 너희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우리도 이러한 질문을 많이 해보지 않았나요? 나의 고통을 보고 계신가요? 나의 이 어려운 상황을 보십시오. 하나님, 정말 나와 함께 계신가요?

 

7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를 읽으면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사순절을 지내면서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에 대한 저의 묵상입니다. 나는 어떠한 하나님을 알고 있는가?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라는 질문은 내가 아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라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형제자매님은 어떤 하나님을 알고 믿고 계십니까?

 

저를 포함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계시고 인격적인 하나님을 생명이 없는 비인격적인 신으로 만들고 믿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나와 하나님의 관계를 생명이 있는 사랑의 인격적인 관계가 아닌, 나와 그것이라는 비인격적인 관계로 만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나와 하나님의 비인격적 관계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신을 섬기는 사람, 신은 나의 제사를 받고 나에게 복을 내려 주는 신이라는 신앙입니다. 내가 신을 기쁘게 해 주면, 그 신은 나의 소원을 들어 주는 신. 많은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의 특징은 그들의 신을 비인격화하는 것입니다. 신과 나는 그냥 무엇인가를 주고 받는 관계로 서로에게 존재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비인격적인 대상으로 만든다면 우리는 우상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단지 하나님을 능력 혹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는 신으로 여긴다면 우리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우상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우상은 단지 다른 신을 섬기는 행위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상은 하나님을 비인격적인 대상으로 만드는 우리의 모든 행위입니다. 우리가 단지 하나님의 능력만을 바랄 때 우리가 빠지기 쉬운 실수는 하나님을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는 신 정도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되면 좋은 하나님, 우리가 어려울 때는 나쁜 하나님 아니 우리와 전혀 상관이 없는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44장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예레미야가 애굽으로 도망간 유대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너희 조상과 너희가 만든 우상 섬기는 것을 멈추라. 너희가 그로 인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답합니다. “우리가 네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하던 대로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그 때에는 우리가 먹을 것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였더니, 우리가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 드리는 것을 폐한 후부터는 모든 것이 궁핍하고 칼과 기근에 명망을 당하였느니라.”

 

사람들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신은 우리에게 복을 주는 신이다. 먹을 것을 풍부하게 해 주는 신이다. 그와 우리의 관계는 상관이 없다. 우리는 그 신에게 분향하고 제사를 통해 그를 기쁘게 해 주고, 그는 우리에게 복을 주면 된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관계가 아니라, “이다. 이 세상에서 편하게 살 수 있게 해주는 신이면 된다.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신이었습니다. 왜요? 하나님은 그들에게 다른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 즉 사랑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찾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땅에서 만사형통하도록 돕는 하나님이십니까? 나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이십니까?

 

우리는 눈에 보이는 하나님을 늘 찾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기적을 갈구합니다. 눈에 보이는 성공과 눈에 보이는 축복을 우리는 자주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우리의 신앙이 이러한 수준에서 머문다면은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늘의 여왕에게 한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지금 사막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딜레마입니다. 물이 없는 이 광야에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가 안 계신가? 만약 우리가 기적과 복 그리고 성공만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은 늘 이러한 딜레마에 빠지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지만 사람들과는 반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원하셨던 것은 사랑의 관계입니다. 신명기에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시험했다고 말합니다. 사랑은 인격적인 관계에서만 가능합니다. 생명이 있는 나와 당신이라는 관계에서만 사랑의 관계는 가능합니다.

 

나와 그것은 사랑의 관계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계속적으로 사랑의 인격적인 관계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하나님을 비인격적인 힘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나와 그것은 관계를 형성할 수도 없습니다. 나는 그것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내가 생명이 없는 그것을 사랑한다는 의미는 소유하고 싶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비인격적인 신으로 만든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소유하고자 하는 실수를 범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주인이 되어 내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을 부리고 싶어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데로 움직여 주는 신을 바란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비인격적인 우상으로 만드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우상을 섬기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과 사랑의 인격적인 관계를 나누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어떠한 환경에서도,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많은 고통에서도, 때론 죽음의 두려움에 직면한 순간에도 우리는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여기에 지금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큰 능력을 경험하지 못해도, 우리가 부자가 아니어도, 나의 사업이 기대보다 잘 안 된다 할지라도, 나의 계획이 잘 안 풀리고 있다 할지라도, 나의 집이 잘 안 팔리고 있다 할지라도, 나의 자녀가 나의 뜻대로 살아주지 안는 것처럼 보일 지라도,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라는 딜레마가 아니라, 매 순간의 하나님께서 함께 계십니다.”라는 고백이 우리의 삶에 있기를 기대합니다.

 

왜입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바로 곁에서 나에게 호흡을 주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숨을 쉬고 계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물은 광야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일상의 삶에서 물은 필수입니다. 있으면 좋고, 없으면 불편한 것이 아니라 없으면 우리가 살 수 없는 것이 물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물을 함부로 낭비하는 것은 우리의 생명을 손상시키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물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사마리아 여인의 편이 아닌 예수님 편에서 묵상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이야기의 시작은 사마리아 여인이 아니라 예수님의 목마름에서 시작됩니다. 나는 이런 예수님의 모습이 참 좋습니다. 왠지 인간다운 예수님의 지치신 모습에 더 친근감이 갑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가시다가 피곤하여 야곱의 우물가에 앉아서 쉽니다. 예수님은 목이 말랐습니다. 물이 먹고 싶은데,, 물을 뜰만한 그릇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본 도사들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면 물을 먹고 싶은데 그릇이 없으면, 그릇을 마술을 통해 피용하고만들어서 물을 먹는 모습을 떠 올려 볼 수 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목마르고 지친 몸으로 우물가에 앉아 계십니다. 저는 이런 모습의 예수님이 참 좋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면 그는 자신 스스로를 위해 기적을 행한 적이 없어 보입니다. 유대인들이 당신이 하나님의 보낸 사람이라면 우리에게 기적을 보여서 증명하라고 요구했을 때조차도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한 경우는 모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은 온전히 다른 사람들을 위해 존재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를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의 치료와 회복 그리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시기 위해서 살으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어떤 신학자가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곳은 교회뿐이 없다고 말입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을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몸이 곤하여 우물가에 앉아 있는 모습은 우리에게 보여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충분히 혼자서 우물에서 물을 길려 마실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우물가에 한 여인이 다가 오자 말합니다. “물을 좀 주시오사람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세상은 자꾸만 혼자 살수 있다고 말하고, 혼자 살 수 있는 것들을 만들어 주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아니다, 사람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사는 것이라고.” 우물가에 앉아 있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초차도 이 순간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이 물을 달라고 부탁하는 행위는 여인에게 손을 내미시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은 나에게 필요한 사람입니다. 나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당신은 나에게 소중한 사람입니다. 이 여인이 누구입니까? 상처받은 여인입니다. 마을에서 수치의 여인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 여인을 피합니다. 누구도 이 여인을 자신의 삶에서 필요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누구도 이 여인을 자신의 삶에서 소중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부끄럽게 여깁니다. 손가락질의 대상입니다.

 

우리는 자주 힘있는 사람을 의지하고 싶어합니다. 돈이 있고, 사회적 위치가 있는 사람이 필요한 사람이고 나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그럴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상처 투성이고, 우리가 보기에는 도덕적으로도 이해 할 수 없는 여인, 마을 사람들조차 만나고 싶어하지 않은 여인을 향해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이 행위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너의 손을 잡아 주겠다는 그녀를 예수님의 삶으로 받아드리는 의미와 또 다른 의미는 당신은 나에게 필요한 사람이다라는 몸짓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연약한 사람들을 향해 우리는 두 가지 메시지를 주어야 합니다. 하나는, 우리는 당신의 친구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연약한 자는 돌봄이 필요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우리를 도울 수 있는 소중한 존재임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헨리 나우웨은 연약한 자와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에 하나님이 보내주신 축복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물가에 피곤하여 지쳐 앉아 있는 모습을 생각해 보면 참 좋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나의 좋은 모습만을 보여 주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의 힘과 능력을 보여주고 싶어합니다. 나의 지치고 연약한 모습은 가능하면 숨기고 싶어합니다. 나의 연약함을 부끄럽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나의 연약함과 치침이 때론 새로운 관계를 여는 문이 되고, 순간이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의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의 지침과 목마름이 사마리아 여인과의 새로운 관계를 여는 순간이 된 것입니다. 나의 지친 모습을 숨기고 그냥 늘 좋은 모습만을 서로에게 보여 줄려고 애쓰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 지친 모습 그대로, 연약한 모습 그대로서로에게 다가 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우리의 모습 그대로가 드러나도 부끄럽지 않게 여기고, 그 모습을 통해 더 깊은 관계로 서로가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연약함을 안고 사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연약함에 자유 할 때 다른 사람의 연약함과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연약함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연약함이 드러나는 그 순간이 서로에게 더 깊이 다가갈 수 있는 순간이 된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하지만 쉽지는 않습니다.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드러낸 다는 것도 쉽지 않지만, 상처받은 사람의 마음을 연다는 것도 쉽지는 않습니다. 여인의 반응입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사마리아 여인의 첫 번째 반응은 거절입니다. “유대인들은 평상시에 우리 사마리아 인들을 사람취급도 하지 않는데, 당신이 지금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 것이 말이 됩니까?” 상처받은 사람들은 자신을 보호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다가오는 사람들을 거절하고 피하려고 합니다. 안전하게 자신의 울타리 속에 머물고 싶어합니다.

 

자기방어를 하고, 자기 담을 확인하는 여인을 향해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인은 피곤해 보이는 낯선 유대남자의 말에 흥미가 생깁니다. “당신이 도대체 누구이기에 물 기를 그릇도 없으면서 이 깊은 우물에서 어떻게 물을 생수를 얻겠다는 것인가? 나에게 물을 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이 남자.. 그리고 묻습니다. 12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그럼 당신이 이 우물을 우리와 우리 조상에게 준 야곱보다 더 큰 사람입니까?”

다시 말하면, 당신이 줄 수 있는 것이 야곱이 우리에게 준 것보다 더 나은 것입니까? 이렇게 물어보면 어떨까요? 세상은 우리에게 살아갈 수 있는 물을 주고 있는 데, 당신은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습니까?

 

사람들이 우리에게 또는 교회를 향해서 묻는다면 형제자매님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세상이 주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줄 수 있습니까?

 

세상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많은 것을 줍니다. 더 많은 편리함과 안락함을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듯이 말합니다. 사람들의 눈과 귀를 현혹합니다. 세상은 말합니다. 너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줄 수 있다. 돈 권력 명예.. 네가 원한다면 너에게 줄 수 있다. 내게로 와라

 

많은 교회도 세상과 경쟁하듯이 말합니다. 하나님께 와라 그러면 너희는 복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 와라. 너희는 성공할 것이다. 명예와 권력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얻게 될 것이다. 세상에서 보다 더 나은 직업과 삶을 살 수 있는 복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께로 오면 정말로 세상 보다 더 나은 것을 얻을 수 있나요? 예수님은 여인을 향해 말합니다. 13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그녀의 육체의 목마름과 필요가 아닌 다른 것을 그 여인에게 주겠다고 말합니다. 네가 세상에서 얻은 것은 너의 갈증을 더하게 할 것이다. 네가 가지면 가질 수록, 마시면 마실 수로 계속적으로 목마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주는 것은 네 안에서 솟아나는 영원한 생명의 물이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사도 요한은 요한 복음 738-39절에서 이 생수를 성령이라고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을 바라는 여인에게 네게 성령을 주겠다라고 말합니다. 누가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말합니다. 구하는 자에게 하늘의 아버지께서 가장 좋은 것 성령을 주실 것이다.

 

목마르지 않은 물을 구하는 여인에게 예수님은 뜬금없이 성령을 주시겠다고 대답하십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다시 반복되는 말이지만, 하나님과 우리의 친밀한 관계를 확증하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14-16절에서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내가 너에게 주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랑이다. 성령은 네 안에서 끊임없이 네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것을 확증할 것이다. 그 어떤 것도 그 하나님의 아버지의 사랑에서 너를 끊을 수 없다는 것을 네게 말해 줄 것이다. 그 사랑 안에 있는 너는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사랑에 목말라 여러 남자를 찾았던 이 여인에게 예수님은 말합니다. “너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주겠다.”

 

형제 자매님, 우리는 시편의 기자가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합니까?

시편 63 1절은 또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니이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을 간절히 바라십니까? 우리는 왜 주님을 찾고 또 찾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이 우리의 삶을 이끌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