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예나 지금이나 교회가 참 많습니다. 나도 어리고 젊을때 여러번 교회에 올 것을 권유받았으며 실제로 교회에 다닌 적도 몇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유가 뭐건간에 지금 이 순간 저는 어떤 주요종교의 신자도 아니며 기독교인도 아닙니다. 솔직히 말하면 누가 저에게 와서 저는 교회에 다닙니다라고 자기 소개를 한다면 일단 그 사람은 저에게 약간 감점을 받은 상태가 됩니다. 저는 기독교인이 모두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감옥에 있는 죄수들도 다 나쁜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래도 누군가를 감옥에서 만나면 조심하게 되죠. 마찬가지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누가 나에게 와서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소개한다면 특히 개신교도로서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 저는 더 조심합니다. 그러니 그냥 기독교인이 아닌것보다 더 반기독교인이라는 것이 사실인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쯤되면 개신교신자는 범죄자와 자신들을 비교하는 것에 대해 언짢아 할 법합니다. 이 글은 왜 제가 그렇게까지 교회에 부정적인지 그 이유가 저도 궁금해서 쓰기 시작한 글입니다. 물론 그 이유가 무엇이 되었건 이것은 개인적인 믿음과 입장에 대한 글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글은 교회가 나쁘다는 것을 증명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가 저의 개인적 종교부정을 믿지 않아도 좋습니다. 이글을 다 읽어보면 그것이 실은 종교부정도 아니라는 것을 알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리처드 도킨슨의 만들어진 신도 읽었으며 그 책을 권장하기는 하지만 그런 책을 통해 종교의 부정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이상화된 종교가 아니라 그저 제가 현실의 한국에, 현실의 한국사람들 사이에 존재한다고 느낀 종교, 특히 교회안의 개신교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목사가 싫다. 


제가 기독교를 싫어하는 이유중 첫번째는 저는 목사라는 직업이 싫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글 전체가 나는 왜 목사를 교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에 대한 설명을 조금씩 더 심층적인 차원에서 생각해 보기 위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는 천주교신자가 될 의지도 불교신자가 될 의지도 없지만 교회를 훨씬 더 부정적으로 생각합니다. 


한국의 개신교를 말할 때 목사를 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말하면 목사가 곧 개신교입니다. 목사는 교회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며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목사는 신도를 두당얼마로 쳐서 교회를 팔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목사라는게 제가 보기엔 참 자기 멋대로 입니다. 그 분들이 모두 나쁜 사람인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한국에서 목사는 그야말로 아무나 됩니다. 신부나 수녀 혹은 스님과 비구니에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윤리적 계율이 있습니다. 고기먹고 술마시며 계집질 하면서도 득도했다고 행사하는 중도 있다지만 최소한 그런 중은 그런 중나름대로 뭔가를 보여주지 않으면서 중으로 대접받고 행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목사는 그 자격도 여러군데에서 얻을 뿐만 아니라 공통적 윤리적 계율이 거의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가 보고 들은 목사, 전도사는, 정말 엉터리 같은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심지어 교도소에 가면 집사 목사 권사 같이 교회에서 중요한 자리 차지했던 사람이 수두룩하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물론 아무나 목사하기 때문이죠. 그 아무나 목사하는 분들이 또 교회세우고 여러가지 감투를 아무나에게 씌워줄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목사는 모두가 이런 엉터리이며 범죄자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저는 단지 사리사욕에 차있는 사람들이 목사라고 칭하기 쉽다고 해서 목사가 싫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문제의 전부라면 좋은 목사님을 찾으면 되는 것이죠. 또 엉터리 종교지도자야 다른 종교에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엉터리나 범죄자가 하기 쉬운 것이 목사라는 것도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할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해도 살인범이 산중에 살면서 중노릇하라고 하거나 성당에서 신부로 살라고 하면 싫다고 할지 모릅니다. 계율이 있고 전체교단이 비교적 큰 경우가 많으므로 윗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살인범이 바로 그 문제의 살인의 경험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면서 간증회를 열고 유명인으로 교인끌어 모으기에 성공한 목사가 되는 것은 얼마든지 상상가능 합니다. 불편한게 없으니까요. 각각의 교회는 말하자면 동떨어진 섬으로 목사는 그 섬의 왕처럼, 양식장 주인처럼 삽니다. 물론 우리 목사님은 왕처럼 굴지 않는다. 겸손하다 말하는 신도는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차차 쓸것처럼 목사를 칭하는 것 자체가 문제인 근본적인 문제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적 지도자는 다 어느 정도 그런 면이 있지만 특히 목사는 그렇습니다. 


현실에 존재하는 목사는 성경을 들고 있고 십자가 밑에 서있을 뿐 대개 계룡산에 올라가 폭포밑에서 3개월 수도끝에 득도했다는 도사나 어느날 신기가 들어 성황당 나무아래에 있는 귀신동자를 본 무당이나 산마다 있었다는 산적패의 산적두목과 차이가 별로 혹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들은 가정을 이루고 재산을 소유하며 종교활동을 통해 그걸 크게 불리기도 합니다. 가정에 친인척까지 붙어있으니 돈쓸 곳이 많고 종교가 본격적인 직업이 됩니다. 즉 그들에게 있어 종교란 자신의 내적 성장을 위한 행위가 된다기 보다는 교회를 관리하는 직업적 행위로서의 직업으로 전면에 등장합니다. 


그들은 종종 지극히 짧은 시간안에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서 어떤 종교적인 깨달음에 도달했다고 주장합니다. 어떻게 말하면 그냥 신기를 느낀 겁니다. 그것은 거짓이 아닌 그들의 인생에 빛을 발견한 순간처럼 느껴지는 것에 대한 솔직한 신앙고백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또한 너무 성급한, 너무 진지한 노력없는 자기 확신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삶의 태도를 그저 한명의 인간의 삶으로서가 아니라 진리로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마 조선시대에 태어났으면 무당이 되었을 것입니다. 


제가 목사를 싫어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그들이 매우 교만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남을 구할수 없는 사람들이 남을 구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힘든 사람들을 더 힘들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럴 자격이 없으면서 강력한 권위를 행사하고 책임지지 못할 메세지를 확실한 진리라면서 사람들에게 가르치니까 문제인 것이죠. 불행하게도 자격이 없는 사람일수록 교만해지기는 더 쉬운데 그런 사람이 타종교의 지도자가 되기는 좀 어렵지만 목사되기는 쉽습니다. 그러니 더 문제가 큰 것입니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악인이 나중에 뭐하더라 라는 소문이 들릴때 목사나 전도사 한다더라라 하는 이야기 정말 많습니다. 


나를 증발시켜 버리는 종교


저는 앞에서 목사나 전도사는 아무나 한다던가 교만하다던가 하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신도중에는 우리 목사님과 전도사님이 공부 얼마나 열심히 하는데라던가 우리 목사님은 얼마나 겸손하신지 모른다라고 말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그저 단순히 공부한다던가 겸손하다던가 하는 것과는 좀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주로 개인으로서의 존재감과 책임감에 대한 것입니다. 

 

종교의 의미가 뭐가 되었던 사람이 종교적이어야만 한다면 그 종교는 근본적으로 개인적이어야 합니다. 어차피 종교는 논리가 아닙니다. 과학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최소한 윤리적 체계라도 있어야 합니다. 행동에서 생활에서 달라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물론 집단으로서, 사회적 관계에서의 생활방식이기도 해야겠지만 결국 개인의 윤리, 개인의 생활방식이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훌룡한 종교생활을 하는것 같은데 그 종교공동체 바깥으로 가면 전혀 제구실을 못하게 하는 종교가 있다면 즉 개인으로서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오히려 더 잊어버리게 만드는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아주 나쁜 종교입니다. 


그 이유는 제가 종교를 비판적으로 보는 이유의 핵심인 인간의 유한성때문입니다. 결국 신이 존재한다고 해도 모든 인간은 유한하며 그 인간들이 전하는 메세지든 글이든 다 유한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든 불경이든 인간이 관여한 것이 절대 틀린 것이 없는 절대진리라는 말은 다 헛소리입니다. 왜냐면 인간은 그리고 인간이 관여한 것은 다 유한한 것이기 때문에 그 해석은 항상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든 불경이든 애초에 글로 씌여진 것일 뿐만 아니라 번역된 것인데 말해 뭐하겠습니까. 


어떤 종교가 그 안에 있는 사람의 개인으로서의 윤리를 증발시키고 행동력을 증발시킨다면 그것은 내가 곧 예수다거나 내가 곧 부처라고 말하면서즉  스스로룰 신을 자칭하는 사람, 절대적 진리로 말하는 사람이 이끄는 사이비종교와 차이가 없습니다.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이러이러한 것은 절대적 진실이라고 믿고 그 안에서 자기를 잃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가족도 없고 재산도 없고 미래도 없는 로보트나 노예, 죄수나 다름없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가 이렇지 않냐고 말하지 모릅니다만 거기에도 정도 차이는 있습니다. 어떤 종교는 개인적 윤리를 강조합니다. 즉 개인의 깨달음, 개인과 신과의 소통을 중요시하며 그런 측면에서는 종교적 집단이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종교는 집단적 윤리만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나쁜 중은 절에 시주많이 하고 백일기도 많이 하면 성불한다고 말할지 몰라도 불교는 본래 개인적 깨달음을 강조합니다. 즉 내가 공부해야 내가 깨달아야 가치가 있는 것이죠. 큰 절에 다니는 신도라고 득도에 가깝다는 말은 헛소리입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집단을 빼고, 다시 말해 집단 행동양식을 빼고 나면 거의 남는게 없습니다. 그러니 저는 목사는 교만하며 개신교는 정말 나쁜 종교라고 느끼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개신교의 기원인 종교개혁의 정신의 정반대에 서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는 홀로하라고 하셨다는데 교회신자들은 떼거리로만 다닙니다. 그리고 교회도 이 교회와 저 교회는 서로 섞이기 어렵습니다. 불교도나 천주교신자처럼 일종의 도반으로서의 큰 공동체의식도 거의 없습니다. 있는 것은 그저 우리 교회라는 교회공동체에 대한 소속감뿐이기 때문이죠. 


교만한 종교지도자는 사설감옥의 운영자나 다름없습니다. 사람들은 그 각각의 양식장 안에 갇혀서 자기를 잃어갑니다. 그 바깥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견딜수 없게 됩니다. 집사니 권사니 하는 직위에 집착하게 됩니다. 자기가 그것을 얻기 위한 투자가 아깝다는 말을 하게 됩니다. 


종교가 아닌 것을 떼어내면 교회라는 공동체에 뭐가 있을까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외국에 있는 한인교회는 더더욱 그렇지만 한국에서도 교회는 종교단체가 아니라 무슨 공공서비스 단체같은 형태를 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보를 나누고, 문화센터처럼 교육을 담당하고 탁아서비스도 하고 자원봉사 서비스도 합니다. 불우이웃돕기 모금도 하고 위문공연도 합니다. 저도 이스라엘에서 한번 그랬던 적이 있지만 외국에서 한인교회 다니는 한국사람들은 대개 인적네트웍때문에 어쩔수 없이 다닙니다. 


문제는 이런건 종교가 아니라는 겁니다. 목사말 잘듣고 성금은 꼬박꼬박하면 훌룡한 종교인이 되는거라면 조폭도 종교가 됩니다. 보스의 말에 충성하고 상납급 꼬박꼬박 지불하면 훌룡한 조폭의 조직원이라고 인정받으니까요. 일본 야쿠자는 나름 서로 맹세할때 규칙도 있는걸로 압니다. 십자가 앞에서 맹세하면 종교고 십자가가 없으면 종교가 아닙니까?


잘먹고 잘살자라던가, 서로 돕고 사는 공동체를 이루자는 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그게 종교라면 생활협동조합을 세운 사람들은 전부 사이비 종교에 다니고 있는 것입니까? 회사도 그런 집단입니다. 그럼 한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종교는 삼성교입니까?


친절하고 여러가지 편의를 봐주고 상처입은 사람들, 외로운 할머니들에게 위안을 주고 동료와 친구를 만들어 주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종교는 아닙니다. 가사도우미가 돈받고 누구집 부엌일을 해주고 청소를 해주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가사도우미가 나는 가정의 여신이라고 말하거나 나는 부엌신이라고 말하면서 너의 정신을 나에게 맡기라고 하면 그건 사기가 됩니다. 


교회가 좋은 일을 많이 한다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는데 다시말하지만 저는 그들의 서비스를 문제삼는게 아닙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아름다운 마을만들기를 한다고 해봅시다. 이 마을은 착한 일도 많이 한다고 해봅시다. 그 마을의 이장은 그 마을에서 정신적 지도자일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이 마을공동체는 종교공동체가 아닙니다. 왜냐면 이장은 여전히 인간이며 자신의 메세지가 종교적인 수준에서 즉 절대적으로 옳다고 주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장의 메세지와 주장은 인간의 메세지와 주장이지 진리라고 주장되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적 배신감을 느끼고 좌절한 분들이 교회에서 위안을 찾았다는 분들 많습니다. 저는 그런 말들으면 슬픕니다. 마약은 약이 아닙니다. 아픔을 서둘러 봉합해서 뭔가 더 배우고 느꼈어야 하는 사람이 서둘러 아픔을 없애버릴 뭔가를 찾으면 그 사람은 결국 스스로에게나 주변 사람에게나 더 길고 큰 아픔을 주게 될 것입니다. 친구와 동료로부터, 스승으로 부터의 위안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위안은 인간으로부터의 위안이어야 합니다. 자신이 절대적 신의 손길을 느꼇다고 느끼는 것은 마약성 환각입니다. 


이런 모든 서비스적이고 사회적인 것을 떼어낸 후에 교회에 정말 뭐가 있는가 가만히 보면 저는 종교라고 생각될만한 것을 거의 발견하지 못합니다. 개인에 대한 강조가 정말 작기 때문입니다. 개인이 작은 종교는 마약입니다. 거대한 강당을 채운 사람들이 목사앞에서 할렐루야를 외치는 모습을 보면 저도 왠지 기도가 하고 싶어집니다. 저 목사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 목사님은 겸손하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뭘 배웁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경험이 많고 고민을 많이 한 분들이 계십니다. 그 분들이 살아가는 법에 대해 고민한 것을 주변에 나눠주고 같이 고민을 해나가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또 제가 인간의 유한성을 거론하며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믿을 수 없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믿음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저는 믿음을 소중히 생각해야 하며 삶의 방식에 대한 믿음을 주변사람과 공유하고 나눠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적 보편성에 기반하여 민족적 역사적 문화적 공동체를 의미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친절하고 겸손한 목사를 보면서 교회 공동체도 본질적으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개인적으로 겸손해도 제가 그것을 교만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교회란 기본적으로 신 즉 절대적 존재나 진리를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자기를 낮춰 말해도 신의 뜻을 남에게 말하는 사람들은 다 교만한 것입니다. 자기가 뭔데 신의 뜻 다시 말해 진리의 최종적 단계를 압니까? 또 교회에서는 과장되게 각자의 종교를 고백하라고 종용당합니다. 그렇게 해서 서로 서로 좋은 영향을 주고 받는게 아니라 우스꽝스런 광신으로 진행되어가게 됩니다. 


앞에서도 썼지만 저도 스스로 왜 제가 기독교 특히 교회에 대해 부정적일까에 대해 알고 싶어서 이 글을 쓴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쓰다보니 그 핵심적 이유는 결국 인간의 유한성과 나를 지키는 문제로 줄어든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내가 유한한 존재라는 것은 신을 언급하는 것을 지극히 제한시킵니다. 신이나 종교는 변할 수 없는 최종적 단계를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장합니다. 지금의 내가 정신적으로 미숙하여 좁은 세상만 봤던 옛날과 다르듯이 미래의 나는 또다시 뭔가를 배우고 더 큰 뜻을 깨닫고 다른 것을 보는 존재가 될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시들어 어린애 같아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게 뭐가 되었던 지금도 그리고 미래에도 나는 절대에 도달하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이 그러하듯이 미래에도 저는 유한한 존재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인생의 의미에 대해 뭘 느끼든 그것에 신의 뜻 운운하는 것은 지극히 해롭고 교만한 일입니다. 신이란 절대이기 때문이죠. 3층에서 4층보면서 윗층이라고 부를 수는 있지만 그걸 옥상이라고 부르면 그 사람은 그 위는 없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종적 단계를 말하는 것은 적어도 두가지가 나쁩니다. 하나는 그 최종단계 뒤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해서 우리로 하여금 질문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따라서 성장하지 못하게 합니다. 또 하나는 인간은 서로 다른 단계와 과정을 걸쳐 성장할지 몰라도 모두 어떤 단계를 거쳐서 성장한다는 것을 잊게 만듭니다. 최종적 단계를 거론하는 것은 자기의 느낌으로 단계 단계 성장할 것을 권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최종적 단계이니 곧장 이것을 외우라는 것이 됩니다. 


신의 뜻을 말하는 것은 마치 초등학생에게 공부의 목적이란 대학교 입시시험을 통과하는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은 마치 대학교에 들어가고 나면 공부따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며 곧바로 대학입시만 바라보고 공부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좋은 대학생으로 살기도 어렵지만 좋은 입시생도 못됩니다. 왜냐면 공부란 단계적으로 하는 것인데 처음부터 최종단계만 바라보면서 꼼수만 배우고 문제푸는 기계만 되려고 하기 때문이죠. 대학입시따위는 있는줄도 모르고 그저 재미있어서 책 열심히 읽었던 어떤 다른 학생이 때로는 훨씬 더 좋은 점수를 대학입시에서 받는 것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도대체 이거중에 뭐가 대학입시에 나올까 같은 질문은 하지 않으면서 읽었던 학생이 말이죠. 


모든 종교는 절대적 경지나 존재를 말하기는 하지만 교회는 섯부르게 득도했다고 주장하는 계룡산 도사처럼 너무 쉽게 절대를 선언합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교회는 작은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윗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감옥도 큰 감옥이 있고 작은 감옥이 있는데 교만하여 종교적 지도자가 되어 작은 감옥을 만든 사람들은 사람들의 정신을 제약합니다. 불확실한 것을 확실하다고 절대적이라고 말하는 결과중의 하나는 다른 것과의 공존이 불가능하고 어려워 진다는 것입니다. 절에 불을 지르고 전통적으로 불교국가였던 한국의옛날 조상들을 언급하면서 그들은 지옥에 갔을거라고 말하는 호전적인 기독교 신자들이 탄생하는 이유는 그들이 너무 쉽게 진리를 들었다고 믿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은 현실적으로는 인간에게 거의 의미가 없습니다. 도박중독증 환자는 자신이 도박에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할지 모르지만 도박이 나쁜 거라고 생각한다면 도박장을 망하게 하거나 도박에 크게 잃어서 더이상 도박을 못하게 하는 것이 좋은 일일수 있습니다. 더 큰 다른 의미로는 다시 그 도박에 성공하는 것이 좋은 일이 될 상황이 또 얼마든지 있을수 있지요.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의미에서 좋은 일이란 우리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신의 뜻은 알수 없는 것이죠. 결국 우리는 절대는 바라보지 말고 지금 우리가 서있는 곳에서 우리가 할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살수 있을 뿐이며 신의 뜻같은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맺는 말


이 글을 자세히 읽은 분이라면 표면적인 것과는 달리 제가 종교를 부정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종교를 옹호하고 있다고 느낄지도 모릅니다.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사색하고 고민하면서 신의 뜻을 추구하는 개신교도가 있다면 얼마든지 존경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글 전체에서 우리는 각자의 인생을 각자 살아갈 뿐이라고 말하면서도 제가 남의 종교에 대해 이러니 저러니 하는 이유는 그것이 개인적 행위를 훨씬 넘어서 주로 사회적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아갈 세상이 매우 혼탁해 지면 그것은 나의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스스로 교만하고 무책임했다는 것을 반성하거나 교만하고 무책임한 사람들을 막는 것에서 멈추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환자가 있으니 돌팔이 의사가 넘쳐나는 것이죠. 한국은 외로운 사람이 많고 자살률이 엄청 나게 높습니다. 지혜의 빛이나 같이 있어주는 친절함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이 그런 것을 구할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쉽게 마약에 손을 댑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녹여 없애 버립니다. 


한국에서 교회란 가장 성공한 사업입니다. 그것은 부끄러운 한국의 일면을 보여줍니다. 교회의 성공은 적어도 일정부분 교회가 제공하는 공동체 서비스가 사람들에게 필요한데 그것을 사회가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미국같이 빈부격차가 엄청난 나라를 제외하면 선진국은 대개 종교를 가진 사람의 수가 작습니다. 유럽이 좋은 예입니다. 기독교의 본산인 유럽에서 기독교는 이미 그리 인기없습니다. 한국도 예외적입니다. 즉 한국정도 부유한 국가에서 이렇게 교회가 난립하는 것은 예외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외롭고 힘든 사람을 많이 양산해 왔으며 여러 비종교적 공동체를 파괴해 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한국 사회의 지식인 문화인은 세상을 보고, 세상을 살아갈 문화적 도구를 제공하는데 있어서, 인생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을 도와주는데 있어서 무능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의 일처럼 말하지만 사실 저도 한국인의 한사람으로서 책임감을 느낍니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많은 일을 보여주고 있는 어른세대의 하나로서 미안한 것이죠.   합리적으로 산다는게 뭔지를 가르쳐줘도 시원찮은 어른 세대가 오히려 합리적인게 뭔지에 대해 혼돈만 일으키는 언행으로 세상을 흐리게 하는 것같아서 미안합니다. 저는 또한 자식세대로서 한국전쟁이후에 고된 노동을 하며 살아온 노년 세대가 외로운 분들이 많은 것도 미안합니다. 


우리가 이밥에 고깃국먹는다는 식의 저열한 행복의 목표를 벗어나 어떻게 사는 것이 합리적이고 행복한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면 무책임하고 교만한 종교지도자는 설 곳이 없어질 것입니다. 주거 문화를 어떻게 바꿔야 할 것인가라던가 공유경제운동, 마을 만들기 운동을 하는 것을 제가 기쁘게 느끼는 것은 그때문입니다. 아무쪼록 모든 시도가 좋은 결실을 맺고 소외되는 사람없이 모두가 그런 문화적 공동체적 혜택을 받아서 바람직한 삶을 살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