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총 님이 쓰신글입니다.


균형과 절제라... 딱히 흠 잡을 데 없는 옳은 말씀입니다. 

허나 저는 극단으로 가 본 사람만이 균형과 절제를 말할 자격이 있다고 믿습니다. 

정의를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함께 피흘리며 싸워보지 않은 사람이 균형과 절제를 운운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 같은 이는 감히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말은 내부자의 입에서 나와야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요?

내남이 다 아는 식상한 얘기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을 정화하는 데 있어 균형이나 절제 같은 건 없었습니다. '폭력적'일 정도로 상을 뒤집어 엎고 과격하게 채찍질을 해댔지요. 요한은 그런 예수의 모습을 놓고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켰다"(요 2:17)고 표현합니다. 

정의를 향한 그 열정에 삼키운 바 되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그런 살벌한 예수의 모습을 놓고 "나사렛 예수, 그동안 좋게 봤는데 너무 지나치군!" "저렇게 과격한 사람인 줄은 나도 몰랐네. 절제의 미덕이 없어, 쯧쯧..." 하며 수군거렸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성전 제도를 통해 오랜 수탈에 시달리던 민초들에게는 그보다 더 선명한 저항의 몸짓이 없었을 겁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평론가적인 입장에서 나온 균형이니 절제니 하는 점잖은 훈수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함께 분노하는 것이며, 함께 눈물 흘리는 것이며, 함께 피흘리는 것이며, 함께 잡히고 갇히고 고난받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가운데에서 분노가 우리를 사로잡지 않도록, 우리만이 의롭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우리 힘으로 불의를 패퇴시킬 수 있다고 믿지 않도록 스스로를 성찰하는 목소리가 나와야 합니다. 

또한 참을 수 없는 분노의 파열음이 아직은 불의를 직시하지 못하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거부감을 줄 수도 있으니 전략적인 측면에서의 절제가 필요함을 논한다면 그 또한 설득력이 있겠지요. 

하지만 한 번도 극단주의자가 되어 보지 않은 분들이 절제, 균형을 말하는 것은 기득권 체제를 옹호하는 빌미로 사용되기도 하고, 정의를 위해 피흘리는 이들에게는 폭력이 될 수도 있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아프게 배웠습니다.

잊지 맙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썩어빠진 기성 종교 권력을 상대하는 데 있어, 복음이 가난하고 낮은 자들을 위한 것임을 선포하는 데 있어, 무엇보다 사랑함에 있어 극단주의자였음을. 

이제는 식상한 마르틴 루터 킹의 연설 중 한 대목을 인용함으로 그닥 올리고 싶지 않아서 대충 쓴 이 글을 맺고자 합니다.

"인종차별의 독화살에 맞아 보지 않은 사람들의 입에서는 “기다리라”는 말이 쉽게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악한 폭도가 당신들의 부모를 마음대로 죽이고 동기간을 기분 내키는 대로 익사시키는 것을 보았다면, 증오에 찬 경찰관들이 당신들의 흑인 형제자매를 욕하고 발길질하고 죽이기까지 하는 것을 보았다면, 2천만 흑인 형제의 대다수가 이 풍요로운 사회에서 가난이라는 답답한 우리에 갇혀 질식당하고 있는 것을 본다면….

당신들도 여섯 살배기 딸에게 텔레비전 광고에 나오는 놀이공원에 갈 수 없는 이유를 대지 못해 졸지에 혀가 굳고 말더듬이가 된다면, 흑인이라 놀이공원에 갈 수 없다는 말을 듣고 딸의 눈에 그렁그렁 맺히는 눈물을 본다면, 그 어린 마음에 벌써부터 열등감이라는 불길한 먹구름이 끼는 것을 본다면, 무의식중에 백인에 대한 원한이 싹터 점점 성격이 비뚤어지는 모습을 본다면….

당신들도 다섯 살배기 아들한테서 “아빠, 백인들은 왜 이렇게 흑인들을 못살게 굴어요?”라는 질문을 받고 대답을 쥐어짜내야 한다면, 먼 길을 이동할 때도 흑인을 받아 주는 모텔이 없어 밤마다 자동차 안에서 쭈그리고 자야 한다면, ‘백인용’과 ‘유색인용’이라는 지긋지긋한 표지판에 날마다 굴욕감을 느껴야 한다면, 이름 대신 ‘껌둥이’로 불리고 나이와 상관없이 하대를 당해야 한다면, 당신들의 아내와 어머니가 결코 ‘부인’이라는 존칭을 듣지 못한다면…."

이어 킹은 절제와 균형을 모르는 극단주의자라는 비난에 대해 이렇게 응수합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에게 선을 행하고, 너희를 악하게 이용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하신 예수는 사랑의 극단주의자가 아니었습니까?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라고 한 아모스는 정의의 극단주의자가 아니었습니까?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고 한 바울은 기독교 복음의 극단주의자가 아니었습니까?

'저는 여기에 서 있습니다. 이렇게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저를 도와주소서'라고 한 마르틴 루터도 극단주의자가 아니었습니까? '내 양심을 팔아먹느니 차라리 죽는 날까지 감옥에 있겠다'고 한 존 번연도 그렇지 않습니까? '절반의 노예, 절반의 자유로는 이 나라가 살아남을 수 없다'고 한 에이브러햄 링컨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이 자명한 진리를 천명한다'고 한 토머스 제퍼슨도 그렇지 않습니까?"

저도 균형과 절제가 필요함을 잘 압니다. 제 책에도 썼듯이 영적 절정에 머무르려는 마음도 탐욕이 될 수 있고 하나님과 가까이 하려는 열망도 때론 삼가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치만 균형과 절제는 예수와 킹 목사를 따라 극단주의자가가 되어 본 다음에 논해도 늦지 않습니다. 

극단주의자가 되는 걸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두려움에 붙들려 더 너른 세상으로의 걸음을 떼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생명력 넘치는 수액이 얼마나 시퍼런지 알 수 없을 겁니다. 하이데거가 즐겨 인용했다는 횔더린의 파트모스 찬가는 “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도 자라는 법”이라고 노래합니다. T. S. 엘리어트는 "너무 멀리 가기를 마다하지 않는 자만이 얼마나 멀리 갈수 있는지 알 수 있다"고 화답합니다.

요한이 일러주었듯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김어준도 걸한 목소리로 독려합니다. "쫄지 마, 씨발!"이라고요.

벗님들 모두 사랑에, 정의에, 평화에, 생명에 한껏 극단주의자가 되는 한 해가 되길 비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