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NewsNJoy 에서 퍼온 글입니다. 어떻게들 생각하시는지 한번 토론을 시작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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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깨끗한 부와 맑고 깨끗한 가난…선한 청지기의 삶이 달란트  

청부와 청빈 개념

오늘 우리 사회에서 논의되는 이슈는 다양하다. 남북한 정상의 만남으로 교류가 확대되고 금강산 관광과 경의선 연결로 통일이 성큼 다가서는 듯 싶다가, 북한 핵과 미국의 공화당 정권의 등장, 우리나라의 남남갈등, 보혁 갈등으로 남북관계는 전혀 새로운 국면에 처해지고 있다.

한때 이라크 파병과 대통령의 재신임 건, 행정수도 이전의 이슈가 현재는 국가보안법 개폐 등 서로 다른 입장으로 나뉘어져 있다. 최근 기독교계에서 제시된 또 다른 이슈 중의 하나가 바로 청부인가 청빈인가라는 주제가 아닌가 한다.

한자의 뜻대로 맑고 깨끗한 부와 또 맑고 깨끗한 가난을 의미한다. 청빈에 대한 생각과 예찬은 동서양에서 비슷한 전통을 갖고 있다. 청빈은 고양된 사상과 높은 학문과 실천의 경지를 나타내는 한 기준'로 이해되기도 했다. 공자는 논어에서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가하다'고 했으며, 불사이군의 충성을 지키며 수양산에서 죽어간 백이숙제의 얘기는 부정한 부와 명예보다 맑고 높은 절개에 가치를 둔 청빈의 삶이라 할 수 있다.

간디는 "우리 사회는 필요를 위해선 충분하지만 탐욕을 위해서는 부족하다"고 하였고,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라는 말에서 보듯이 가난은 약간 불편한 것이지 그 이상은 아니다고 인지되고 있었다. 불교는 청빈을 주요 가치로 여기고 있으며 법정 스님은 무소유를 강조하고 있고, 시인 서정주는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칼린 지브란은 "가난한 친구여, 가난을 즐겨라. 그대가 정의를 말해 줄 입이 되고 삶을 기록한 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친구여, 가난을 기꺼이 맞아들여라. 그래야 그대를 지배하는 사람들에게 미덕의 기준을 보여 줄 것이고, 그대를 다스리는 사람들에게 성결한 푯대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가난은 우리를 맑고 깨끗하게 하며 고양시키며 최소한의 물질로도 충분히 살게 하며, 정신적이고 신앙적인 참 삶을 살게 한다. 이것이 청빈론의 요지다. 이러한 청빈론에 대해서는 그 정신은 존중하나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현대의 생활에 적절치 않은 부분이 있고 패배주의적인 신앙 아니냐는 비판도 존재한다.

한편 역사적으로나 세계적으로 부자로서 선행을 하고 사회에 많은 도움을 준 사람들이 허다하다. 여기에서 부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나 은사로서 자신의 재물을 잘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청부론이 고개를 든다. 우리 사회는 아담 스미스가 말한 개인의 이윤 동기에 의해 생산되고 부와 자본이 축적되어 더 큰 생산성을 갖게 되는 자본주의 사회다. 자본주의 사회는 개인의 능력 차이에서 오는 부의 차별성이 존재한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가장 큰 문제는 분배의 불균형에 있다. 자신이 노력한 만큼의 수입을 보장한다는 원칙은 좋으나, 적절한 통제가 없으면 가난한 사람은 가난을, 부자는 부를 대물림하는 상황에 이른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는 삼박자 축복 또는 영육 간에 형통하는 축복과 기복이 핵심 복음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는 청부론이란 형태로 나타나며 깨끗하게 벌어서 깨끗하게 쓰면 그것이 복을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트의 검소한 절약 생활을 통해 축적된 자본이 근대 자본주의를 가능케 했다는 막스 베버의 주장도 부를 긍정적 각도에서 접근한 중요한 시도였다.

근래 청부론의 주창자들은 교회 일에만 충성하면 무조건 만사형통하다고 말하지 않고, 바른 생활과 바른 신앙을 강조한다. 옳게 믿고 옳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자신의 수입에서 다른 사람의 몫을 반듯하게 떼라고 요구하며, 그렇게 하면 결국 물질적인 복을 받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청부론이 기복주의와는 다르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런 청부론에 대해서도 비판이 제기된다. 청부론은 기복주의를 교묘히 포장한 것이며 기독교의 근본 가르침과 다르다는 주장이다. 기복주의 신앙의 핵심은 신앙 목적을 하나님과의 관계나 존재의 변화에 두지 않고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데 두는 것이다. 청부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나 '존재의 넉넉함'을 충분히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들의 결론은 '소유의 넉넉함'으로 귀결되며, '풍요로운 삶을 얻기 위해 제대로 믿으라'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존재의 넉넉함'과 '소유의 넉넉함'을 모두 가지려는 욕심 즉 하나님과 돈을 함께 가지려는 욕심을 조장할 수 있다. 그들은 '우선순위'(priority)만 제대로 하면 된다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우선순위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선택'(choice)을 말씀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경의 부자와 가난함

성경에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이루어졌다. 예수님의 비유 중 많은 부분이 돈과 관련되어 있다. 구약의 족장시대 믿음의 선진들은 큰 부자들이 많았다.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모두 큰 부자였다. 동방의 의인이자 부자 욥, 사사시대의 사사들과 이후 왕들도 부자였다. 물론 가난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했던 의인들도 많이 있다. 모세, 아론, 사무엘, 엘리야, 엘리사등도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이후의 많은 선지자들도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신약에 오면 예수님과 제자들과 사도 바울과 많은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가난한 상태가 아니었나. 예수님께서도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고 하시면서 가난을 말씀하셨다. 물론 신약시대에도 부자들이 있다. 아리마대 요셉과 세리장 삭개오는 부자였을 것 같고, 백부장 고넬료도 당시에는 부자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물론 성경 인물을 부의 정도를 가지고 빈부를 나누는 일은 어려운 일이며  비교의 기준도 일정하지 않아 쉽지 않음을 느낀다.

주님의 기도와 야베스의 기도

오늘 우리 주변에 야베스의 기도가 인기 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개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란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역대상 4:10)란 구약성경이 인기가 있다. "지경을 넓히라"와 "복에 복을 더하사"란 구절은 많은 집회의 구호로 등장한다. 또 야베스의 기도는 하나의 교육 훈련 프로그램 형식으로 개발되어 참여하기도 한다.

야베스의 기도는 주님의 기도와는 다르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하나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고 하나님 나라와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물질의 부요보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시며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신다. 오늘날 '주님의 기도' 대신 '야베스의 기도'가 더 사랑받는 현상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잘 먹고 잘 살기 원하는 사람에게 주님의 기도는 매력이 없을 지도 모른다.

빈부 격차의 심화와 구조화

자본주의 역사에서 빈부 격차는 오래고 깊다. 상대적으로 그 역사가 짧은 우리 사회는 아직도 빈부 격차에 대한 비판과 불공정한 부에 대한 멸시가 강하다. 그래서 졸부와 벼락부자에 대한 비판이 강하고 부동산 투기나 부정한 방법으로 번 돈에 대해 비판한다. 그런 사람은 국가의 고위직에 올라갈 수 없음을 지난 정권에서 보았다.

미국 사회를 비판하며 자연의 삶을 사는 스콧 니어링(Scott Neering)은 자본주의 원리를 '네가 일함으로 나는 논다'는 문장으로 요약한 바 있다. 미국식 자본주의에는 '놀고먹는 사람'과 '먹기 위해 일하는 사람' '일해도 먹기 어려운 사람'의 세 부류가 있다. 그래서 미국에는 천국과 지옥이 공존한다. 한 도시 안에서 특권층은 상상할 수 없는 사치와 향연을 벌이는 한편, 빈민들은 배고픔으로 잠을 못 이룬다.

소득과 부의 분배 정도를 나타내는 로렌츠 곡선을 보면 미국은 물론 우리나라의 빈부의 격차가 더 심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의 경우에도 2002년 20월 <뉴욕타임스>에 실린 프린스턴 대학교 폴 크루그먼 교수(Paul Krugmann)의 보고에 의하면, 미국 100대 기업 CEO의 연봉은 70년도에 일반인의 39배였으나, 1999년에 이르러 1,046배가 되었다고 한다.

2002년 <이코노믹 저널>(Economic Journal)에 의하면 세계 인구 중 가장 부유한 1%(5천만 명)의 재산이 가장 가난한 60%(27억 명)의 재산보다 더 많다고 한다. 최근 <파이낸셜 타임스>(Financial Times, 2002년 8월 17일자)는 미국 상위 1%가 1981년에는 미국 자산의 25%를 소유했던 것에 비해 90년대 후반에는 그 비율이 38%로 증가했다고 보도했다. 이러한 빈부 격차는 정보의 격차와 지식의 격차에 의해 더 심화되고 구조화될 것이다.

달란트와 청지기

이런 청빈과 청부에 대한 논쟁의 해결을 위해 우리는 어떤 점에 유의해야 할까. 먼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보다 쉬우니라"(눅 18:25)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유명한 비유이지만 여기서 바늘귀는 유대 민족이 외부의 침략을 막고 적이 신속히 성안으로 침입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약대나 말과 같은 큰 짐승이 쉽게 성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약대 바늘귀을 만들어 약대가 무릎을 꿇고 간신히 들어올 수 있도록 해 놓은 문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약대의 등에 재물을 싣고 성안(천국·하나님 나라)에 맘대로 선 채로 들어 올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재물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무릎을 꿇고 겸허히 바늘귀를 통과할 때만 가능하다는 뜻이라고 본다.

둘째, 부와 가난은 그 자체가 성도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목적대로 열심히 생활하고, 일하고, 전도하며, 이웃을 돕고, 선행을 행한 결과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부자가 되기를 목표하지 않고 가난해지기를 목표하지도 않지만, 성실하게 본분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욥처럼 시험하시기도 하고 다시 축복해 주시기도 한다는 점이다.

셋째, 달란트 비유(마 25:14~30)처럼 우리의 달란트가 5달란트인지, 2달란트인지, 1달란트인지 모르지만 최선을 다해서 일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칭찬하시고 축복하사 큰 복을 주신다는 점을 기억할 일이다. 특히 1달란트 받은 자라도 그가 열심히 일해 1달란트를 더 남겼더라면 5달란트 받은 자와 같이 똑같이 칭찬을 받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청지기에게는 소유권이 없지만 열심히 맡겨진 일을 감당할 때 하나님의 칭찬이 있다는 점이다. 월마트를 창시한 셈 월튼이나 코닥 필름의 창업자나 우리나라의 유한양행의 창설자 유일한 박사나 그들이 자기 기업을 일구어 많은 돈을 모았지만, 청지기로서 그것을 자신의 재물로 삼지 않고 사회에 환원하고 이웃을 돕기 때문에 칭찬을 받는다. 자신의 재물로 생각하여 약대 등에 높이 싣지 않고 내려 무릎을 꿇고 이웃을 돕고 섬겨서 그들은 부자였으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다고 믿는다.

미국 펜실베니아 허쉬 타운(Hershey Town)에는 밀튼 허쉬(Milton Hershey)가 세운 초콜릿 공장과 그 공장의 이익금으로 운영되는 밀튼 허쉬 학교(Milton Hershey School)가 있다. 이 학교는 허쉬 사장이 사재를 전부 투자하여 만든 고아 학교로 출발했으며 지금은 결손 가정 학생들을 위한 학교로서 최고급 교육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있다.

청부인가 청빈인가를 목표하는 것이 중요하다기보다, 선한 청지기로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성실하게 관리하고 일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결과 하나님이 필요하시면 재물을 주어 부하게 하시기도 하고, 부보다는 영혼의 고아함과 풍요함을 주셔서 가난하게도 하실 것이 아닌가? 선한 청지기의 삶은 우리에게 주어진 달란트대로 믿음을 지키며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창조목적에 부합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

김홍섭 교수 / 캐나다 Trinity Western University, Visiting Profess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