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에 청년들과 함께 중국에 아웃리치를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 두만강 너머 북녘 땅을 바라볼 수 있는 곳까지 가서 아쉬운 마음으로 조국의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 크지 않은 강이었고 다리도 하나 놓여 있었지만 건널 수는 없었습니다. 남북의 화해와 평화 통일을 기대하며 침묵으로 기도하는 우리의 눈에, 북녘 땅 산자락에 큰 글자로 새겨진 ‘속도전’이란 단어가 다가왔습니다. 속도전! 북한 못지 않게 남한도 속도를 내 왔는데, ‘무엇을 위해 우리는 속도를 내며 달려왔고 달려가고 있는지’ 무거운 마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화해를 위해서 노력해 온 것이 아니라, 앞서기 위해 그리고 이기기 위해서 속도를 내 온 남과 북입니다. 냉전으로 인한 적대감과 긴장은 여전히 높은 벽을 사이에 둔 채 한 민족을 둘로 갈라놓고 있습니다.

유유히 하늘을 날며 강 건너편으로 북한과 중국 땅을 넘나드는 새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벽도 경계도 없이 자유롭게 나는 새들이 더욱 행복해 보였습니다. 새들은 바쁘지 않습니다. 서로 속도 경쟁을 하지 않습니다. 요즘 새들이 옛날 새보다 더 빨리 날지 않습니다. 창조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속도 그대로 하늘을 날며 살아갑니다.

자연의 생명들은 결코 바쁘게 자라거나 서둘러 변화하지 않습니다. 계절의 변화는 여전하고 창조주의 섭리인 그 변화 속에서 자연의 생명들은 조급해 하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싹을 틔우고 성장하며 또한 열매를 맺습니다. 창조주를 아는 지식이 그들에게 가득한 듯 합니다.

안타깝게도 유독 우리 인생만이 더욱 자신을 재촉하며 경쟁하며 속도의 전쟁 속을 살아갑니다. 창조주를 놓쳤기에 고아처럼 불안심리가 크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필요에 대해 세상은 너그럽지 않고 인색한 곳으로 여겨지기에 미래에 대한 염려를 안고 살아갑니다.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들꽃을 입히시는 하늘 아버지께서 사랑으로 돌보신다는 것을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현실과 미래에 대한 염려 때문에 바쁩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할 마음의 여유도 없고, 그날 겪는 것으로 충분할 한날의 괴로움이 미래에 대한 염려의 짐으로 가중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도 아버지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진정으로 알지 못하기에 조급해집니다. 내가 서둘러 뭔가 하지 않으면 얻지 못할 것 같고 뒤쳐질 것 같아서 조급한 마음으로 차지하려고 합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먼저 먹이를 얻는다’는 격언이 있습니다.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움직일 때 성공한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지요. 하지만 실제로 먹이 먼저 차지하려고 다른 새보다 서둘러 일찍 일어나는 새는 없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지나친 스트레스로 쉼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전해진 다른 격언이 있습니다. ‘일찍 일어나는 벌레가 먼저 잡아 먹힌다’는 뼈 있는 표현이지요. 조급한 마음으로 앞만 보고 달려가기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하고 이웃들과 관계를 망가뜨리는 어리석음에 대해 도전하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서두르시지 않습니다. 우리에 대해 조급한 마음을 갖고 계시지 않습니다. “보라.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계 3:20).” 우리와 친밀한 사귐을 원하시고 또 우리가 주님의 일에 헌신하기를 바라시지만, 주님께서는 결코 조급한 마음으로 우리 문을 부수시지 않으며 서둘러 몰고 가시지 않습니다.

조급함! 우리 영혼을 어둡게 하고 소중한 관계를 상하게 하는 장애물입니다. 더더욱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시대를 살아가지만, 삶의 걸음이 분주하지 않고 마음에 여유가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바쁘시죠?’라는 인사에 ‘아니 바쁘지 않아요’ 라고 말하며 이웃과 삶을 함께 하는 사람들, 자신에 대해서나 우리의 자녀에 대해서나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신뢰하고 그분의 때를 희망으로 기다리고 그 시간에 신실한 우리가 되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