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과
1. 그리스도를 알기 전의 삶은 어두움에 있는 것과 같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으며, 하나님의 긍휼을 얻지 못한 삶이다.
2. 하나님의 크신 긍휼
3.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들,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4.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것
5-7. 각자
8. 그리스도는 머리이시며 우리는 지체들.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며 우리는 제자들.
그리스도와 우리는 서로에게 속해 있는 연합의 관계.
9. 마음을 합하여 모여 함께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함. 서로 사랑하고 이기적인 요구들을 포기함.
10. 두 가지 중요한 책임을 말할 수 있음.
      - Doing: 우리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함.
      - Being: 우리가 함께 나누는 교제를 세상 사람들이 보며, “새로운 사회, 새로운 인류란 저런 것이구나” 하는 희망을 갖게 되고, “나도 저기에 속하고 싶다”는 갈망을 갖게 됨. (무엇을 행함으로써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가 미치는 선한 영향력)  
11.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공동의 기억”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만약 함께 살아온 지난 이야기를 “공동의 기억”이라고 말한다면, 그 기억은 교회마다 다를 것이고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그리고 다르기 때문에 그 기억에 함께 하지 못하는 사람은 배제되고,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갖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메노나이트도 혈통과 지난 역사를 이야기로 삼을 때, 다른 사람들을 환영하고 품기가 어려워, 마치 민족 그룹인 것처럼 오해받기도 했습니다.
       건강한 교회, 성경적인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오직 성경의 이야기가 “공동의 기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 속에 나타난 사람들의 믿음의 여정, 그들의 실패와 성공, 그들의 수치와 아름다움이 우리의 이야기가 되고, 그들이 걸어온 발자취가 오늘 우리의 걸음과 연결되어, 그것이 우리의 이야기가 될 때, 가장 건강하고 성경적인 교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한인들로서 공동의 기억들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았던 한국에서 있었던 경험들, 혹은 이민 와서 겪었던 일들, 이민자로서 우리만이 갖는 공동의 고민과 생각들, 그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함께 모일 때 나누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민 교회의 이야기들은 주로 그런 것들입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가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이야기들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과거 이야기도 아니요, 우리의 현재 생활이야기도 아니요, 우리의 미래에 대한 염려 이야기가 아니라, 그보다 성경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거울을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나눌 때만, 다른 사람들, 심지어 민족과 문화와 언어가 다른 사람들도 포함시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너무 “메노나이트, 메노나이트” 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메노나이트 신자들의 이야기도 다양합니다. 무엇보다 그들의 믿음의 선조인 재세례파들은 메노나이트라는 공동의 기억도 이름도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었던 공동의 기억은 “성경 이야기”였습니다. 성경의 이야기가 공동의 관심이 되고 공동의 기억이 되고 공동의 이야기가 되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진정한 메노나이트가 된다는 것은 메노나이트를 말하고 메노나이트 방식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말하고 성경적인 방식을 주장하는 것일 것입니다.

12. 우리의 다섯 가지 비전을 말할 수 있을까요? Multicultural/Intercultural Congregation, Horizontal Relationship, Communal Sharing, Holistic Mission, 그리고 Pacifism입니다. 각각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말해 보십시오.

13-15. (정답이 없고 각각 여러분의 생각을 나누는 것이기에, 제게 보내주신 내용 중 두 사람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비교도 해보고 함께 나눌 때 도움도 되었으면 합니다. 두 분은 저작권 침해라고 말하지 않겠지요? ^_^)

13. A: 교회에 대한 일곱 가지 견해에 대해 경험적이 아닌 지식적인 부분에서 대체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라는 부분은 생소하다. 이런 교회의 비전에 대해서 책이나 사람들을 통해 많이 보고 들었지만 본보기의 삶들을 통해서 배워가기는 쉽지 않음을 발견한다.  이런 문제점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시금 함께 모여 성경을 함께 읽고, 함께 해석하며, 함께 실천해 가는 교회의 모습이 요청된다.
  교회의 삶에 있어서 어떤 부분은 개인주의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는 것은 개인의 신앙고백과 세례를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믿음의 고백 이후에는 공동체적인 신앙이 요구된다. 하지만 현재의 우리 회중은 개인주의의 신앙에 많이 치우쳐 있다. 교회에 참여하면서 함께 수고하고 책임져야 할 많은 일들이 있지만 소수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고,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각자의 은사와 역량에 따라 후원하고 일해야 함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모습이 많이 있다. 교회의 비전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망보다도 현실에 정착하는 문제와 우리 가족의 안전과 미래에 보다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살고 있다.  이러한 개인주의를 깨치기 위해서는 예언자적인 메시지가 필요하다.

     B: 우리 회중은 7가지에 대해서 동의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것들을 하나하나 세워나가고 있다. 하지만 이것들이 우리의 신앙 생활과 공동체에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인식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실질적인 노력이나 소망하는 마음이 많은 것 같지는 않다. 공동체는 아이들에게 크리스천들이 걸어야 할 길들을 가르치고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을 공동체가 함께 하나가 되어서 관심을 가져주고 격려하며 돌봐야 하는데 우리는 각자의 자녀들 외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다. 또 어른들의 행동이 아이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이 없다. 그리고 공동체는 항상 새로운 사람에게 열려있는 마음과 환영의 태도가 보여져야 하는데 우리 모임은 나말고 누군가가 하겠지 하는 생각 때문에 새로운 사람에게 관심을 갖지 못하고 있다.

14. A: 교회의 회복을 위해 기도 모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거나 형제 자매의 관계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삶을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B: 새로운 사람들이 외로움과 소외감을 느끼지 않고 교제권 안에서 잘 적응 할 수 있고 메노나이트의 공동체 안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찾고 믿음의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나의 시간과 정열 그리고 노력과 희생이 필요하다. 처음 오신 분들에게 이방인이나 낯선 사람처럼 대하지 않고 한참 동안 보지 못한 친한 친구를 만난 것처럼 그들을 배려하고 섬겨야겠다.

15. A: 오늘날 메노나이트 교회 속에는 재세례파의 전통이 제도 속에 많이 남아 있다. 성인 세례와 성례에 대한 태도, 평화를 추구하는 삶, 목회자가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연구하고 나누고 분별해 가는 모습, 구별 없는 목회자와 평신도, 교회의 행정 조직 등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안타까운 것은 오늘의 메노나이트가 재세례파의 생동감과 능력과 열정 등을 잃어 버려가고 있지는 않은가 하고 생각해 본다. 메노나이트의 정체성에 대한 저자의 지적에 대해 완전히 동의한다. 그들은 성경을 바르게 해석했으며 그에 따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경험했으며 실천해 왔다. 개인적으로 메노나이트가 가진 교회의 비전을 미래의 교회들이나 특히 한국교회가 회복했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메노나이트 교회를 추구하는 지금의 한인 모임이 많이 부족하지만 이미 맛본 자로서 그 길만이 우리가 가야 할 길임을 믿는다. 그렇게 할 때 이 시대에 필요한 교회의 회복이 이루어지리라고 믿는다. 현재의 메노나이트가 굳어져 있다면 다시금 스스로를 깨뜨리는 아픔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생명을 걸고 믿음을 따라 살았던 재세례파들의 삶은 성경에서 보여준 많은 구름과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과 동일한 삶을 살았다. 이제는 우리가 그 길을 걸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음 세대에 전해줄 차례이니까.

    B: 메노나이트가 된지 1년 된 한 목회자의 글을 통해서 나는 다시 한번 메노나이트의 교회론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함께 참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다른 모든 교회에서도 성찬의 예식에 모든 사람들이 함께 참여한다. 무엇이 다른 것일까? 그녀의 고백은 신학적인 바탕에 의해서가 아니라 삶의 체험에서 나온 고백이었다. 무엇이 그녀에게 그런 고백을 할 수 있게 만들었을까? “함께”라는 단어는 단순히 믿는 자들의 모임, 예배드리는 것이기보다는 더 깊은 의미가 있다. 함께 하기 위해서는 먼저 전제되어야 할 것들이 있다. 각자가 처해있는 희로애락이 나누어져야 하고 개인의 삶이 격려되고 공동체를 통해서 검증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나, 나와 함께 하는 다른 사람들과의 책임이 따르는 것이다. 이 책임은 교회라는 구조 안에서 각자의 은사대로 섬기는 것뿐만 아니라 즐거움과 슬픔 그리고 고통과 아픔을 함께 나누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이야 한다. 이런 메노나이트의 본질적이고 실재적인 교회관은 개개인이 강한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영향을 주었다. 그렇다면 이런 것들을 우리 모임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 나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사람들을 그런 모임이 되어지도록 초대할 수 있을까? 이것은 단순히 시간이 가며 해결되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우리는 지금 500년이라는 긴 세월의 메노나이트의 믿음의 여정의 산을 등반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히말라야 산을 등반하는 것과 같다. 수많은 시간동안 많은 사람들이 등반하는 동안 히말라야는 항상 그곳에 서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장비도 변하고 등반하는 길도 달라졌지만 등반하는 것은 매우 단순한 것이다. 그냥 발을 내딛는 것이다. 그리고 묵묵하게 걷는 것이다. 변화와 화려함의 유혹이 있는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어쩌면 이것은 너무나 지루하고 힘든 일 일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발을 내딛는 결단과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묵묵히 걷는 여정이 필요하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지금 메노나이트가 갈등하고 있는 문제들을 가지고 우리를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혈통과 민족으로부터 내려온 습관처럼 우리 크리스천도 관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는지? 기도할 때는 예수님이름 끝마쳐야 한다. 십일조를 해야한다. 주일날은 교회에 가야한다. 등 하지만 예수님이 내 삶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면 그 기도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헌금을 많이 내고 주일이면 어김없이 교회에 오지만 주님의 몸 된 공동체의 일 부분으로 예배를 드리는 체험이 없다면 어떻게 살아서 성장하고 함께 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