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형제자매님께 감사의 인사 를 드립니다. 형제자매님의 배려 덕분에 한국에서 달간 어머니를 병간호하고 돌아왔습니다. 비록 어머니가 병원에 누워 계셨지만, 제가 기억하기로는 이번이 가장 오랫동안, 그리고 가장 가까이에서 어머니와 많은 시간을 보낸 처음이었습니다. 형제자매님의 염려와 기도로 덕분에 어머니도 빠르게 회복되었습니다. 이제 다음 수요일에 퇴원할 예정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께서 형제자매님을 통해 제게 베풀어 주신 은혜였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일반 직장인뿐만 아니라 목회자가 달간 직장을 혹은 교회를 비운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어머니가 다니시고 계시고, 제가 어린 시절부터 다녔던 시골 교회 성도님들이 어머니를 문병 오셔서, 제게 가장 많이 하신 질문이, “교회는 어떻게 하고 왔느냐 것이었습니다. 물론 친구 목사들도 네가 이렇게 오래 있으면 교회는 어떻게 ? 제가 목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질문은 교회는 어떻게 였습니다. 저희 어머니조차도, 말을 하기 시작하시고, 의식이 많이 회복하신 하신 말씀입니다. “아들 교회는 어떻게 ?”

일반적으로 목사가 아주 특별한 이유가 없이는 교회를 오랫동안 비우지 않나 봅니다. 일반적 상식으로도 직장인도 정식 휴가가 아니고서는 오랫동안 직장을 떠날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감사 드립니다. 제가 형제자매님들께 선한 빚을 지었습니다.

처음에는 한국에 때는 뇌출혈로 쓰러지신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나갔기에 아무런 생각이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어머니가 조금씩 나아지면서 저도 형제자매님께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달이란 시간을 떠나 있을 있는 가장 이유는 교회가 목회자가 아닌, 예수님이 중심이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공동체라는 믿음과 형제자매님을 향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님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면 아마 저는 자리를 비울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형제자매님들이 저보다 깊은 신앙과 성숙한 제자의 삶을 살기를 기대합니다. 저보다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힘든 세상 복판에서 매일매일 부딪치는 세상의 유혹에도 넘어지지 않는 예수님의 제자로 사시는 분이 여러분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교회에 처음 방문했을 , 형제자매님 모두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짙게 베여 있어 목사가 누가인지를 알아 없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가장 작은 자가 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저도 성실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주님의 부르신 소명에 신실하게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것입니다.

오늘은 제가 병원 특히 중환자 가족 대기실에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했던 묵상과 나의 연약한 모습을 말씀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의 나는 오히려 나의 약점/굴욕/약함들을 자랑하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말입니다.

9 11 병원에 도착

중환자실에 어머니가 누워계신다.

공항에서 바로 병원으로 왔다.

면회시간이 지났다.

아직 눈을 뜨지 못했다고 한다.

아직 엄마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9 12 중환자 대기실

대기실에 다른 환자들의 가족들이 앉아있다.

뇌종양으로 누워 있는 9살짜리 아이의 엄마도..

뇌종양으로 누워 있는 10살짜리 아이의 엄마도

사고로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25 딸의 엄마도..

뇌신경에 암세포로 의식 없이 누워있는 29 아들의 엄마도..

교통사고로 뇌를 다쳐 달째 의식 없이 누워있는 39 아내의 남편도

때론 근심의 얼굴로, 때론 근심을 이기는 웃음으로 서로를 위로하며

기다린다.

 

이들 대부분은 중환자실에 2-3개월째 의식을 찾지 못하고 누워있는 자녀가,

아내가, 남편이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뇌종양으로 중환자 실에 누워있는 어린 자녀를 어미의 마음을 어떻게 위로할 있을까?

엄마는 그리스도인으로 보인다.

눈에 빨갛게 눈물이 고여 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그리고 그의 선하심을 신뢰하며,

기도하며 자신들의 아픔을 웃음으로 이겨내려 한다..

 

언제 깨어날지도 모른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아무 없는 나는 마음속으로 기도한다.

주님, 이들을 구원하소서.

당신의 선하심과 긍휼하심으로 모든 아픈 이들의 위로자와 치료자가 되어 주십시오. 주님, 당신만을 바라보는 어미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찾아오셔서 만져주소서.”

 

목회자인 나는 이들을 위해 무엇을 있을까?

아무것도 없는 나의 연약함은 오늘도 이들의 아픈 사연만 말없이 듣고 있다.

 

9 14 중환자 실에서

번째 묵상 -“약함은 서로의 벽을 허문다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작은 , 중환자 가족 대기실

지친 사람들이 모여 있다.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


하지만 이들은 서로에게 짜증을 내지 않는다.

신기하다.

지치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서로에게 짜증보다는 서로를 배려한다.

 

사람들의 사연도 다양하다.

할아버지가 이웃에게 고장 자전거를 샀다.

그리고 수리를 해서 있는 자전거가 되었다.

갑자가 이웃 아줌마가 다시 돌려 달라고 한다.

수리비를 2만원을 주면 돌려 준다고 했단다..

주네 안주네 서로 실랑이 하다가 쓰러져 지금 병원에 누웠 있단다..

할머니 말씀하시길, “2만원 때문에…”

 

키를 두고 나온 할아버지, 할머니

열쇠 수리공을 부르면 1 오천 ,

돈을 아끼려고 사다리 타고 2 베란다에 오르다가

떨어져서 오신 할아버지

할머니 말씀하시길..” 오천 아끼려고..”

낚시 갔다가 바위에서 미끄러져 목을 다쳐 마비가 되어 오신 아저씨..

서로 사연을 나눌 때마다 한숨과 웃음도 함께 나눈다.

 

서로를 많이 배려하려고 할까?

우리는 공통의 연약함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환자 실에 힘없이 누워있는 약한 사람들이

대기실에 있는 사람들을 가족으로 묶어 주고 있다.

 

그래

강함이 아니라 약함이 서로의 벽을 허무는 것이다.

강함은 나의 벽은 견고히 세우고,

상대방의 벽은 강제로 부스기에

강함은 다툼이다.

 

하지만 약함은 누구의 벽도 강제로 허물지 않는다.

약함은 자신의 벽을 스스로 허물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나를 주고,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안으로 받아들인다.

 

그래,

강할 때가 아니라 약할 사람은 서로를 품는다.

 

약함은 서로에게 당신은 누구인가 묻지 않는다.

약함은 오히려 당신은 나의 가족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약함 안에서

서로의 힘이 되어주고,

웃음이 되어주고,

눈물이 되어 준다.

 

약함은 공동체를 형성한다.

강함은 나를 지키게 한다.

 

그래서 예수님도 강한 아니라 약한 땅에 오셨나 보다.

연약한 안에서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도록 말이다.

 

예수님도 땅에 수퍼맨으로 오셔서 초능력의 강함으로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고,

가장 연약한 모습,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나 보다.

안에서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도록 말이다.

 

 

9 18 중환자 실에서

번째 묵상-“연약함은 감사를 알게 한다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 왔을

우리는 안에서 진정한 감사와 소중함을 배운다.

우리는 안에서 가장 작은 것에 웃을 있는 기쁨과 감사를 배운다.

 

어머니가 누워계신다.

아주 연약한 모습으로 간신히 호흡을 하면서,

아무것도 드시지 못하고, 물도 마시지 못하고 누워계신다.

 

그런 엄마의 아주 작은 움직임에도 우리는 기뻐하고 웃는다.

눈을 감고 있다가 잠깐 눈만 떠도 새로운 것을 아이처럼 나는 기뻐한다.

엄마가 손가락을 움직였다는 사실에 나는 기뻐하고 눈물을 흘린다.

엄마가 잠깐 나를 알아봤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기뻐한다.

 

엄마의 작은 움직임 하나에 나는 기뻐하고 감사한다.

우리가 연약해 졌을 우리는 많은 감사와 기쁨의 이유들을 찾게 된다.

이것도 연약함이 내게 주는 은총.

 

 

중환자 실에서

번째 묵상-“두려움

 

중환자 실에 누워 계시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제 할머니가 떡을 사와서 함께 나눠 먹었는데..

갑작스러운 소식에 모두 슬퍼한다.

마치 우리 모두의 운명처럼..

갑자기 두려움이 찾아온다.

 

아직도 온전한 의식 없이 중환자실에 누워 계신 엄마가 생각났다.

엄마도 깨어나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두렵다.

 

엄마가 없는 세상이 갑자기 두렵게 느껴진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선하심을 믿고,

그분의 신실하심을 의지하면서도

갑자기 몰려드는 불안과 두려움을 이겨낼 없다.

 

할아버지의 죽음의 소식에

두려움은 나의 가슴을 숨이 막히도록 조여왔다.

 

자리를 뜬다.

그리고 하늘을 본다.

눈을 감는다.

그리고 하나님을 생각한다.

조금은 마음이 달래진다.

, 나의 연약한 마음.

 

그래도 다행이다.

두려울 바라볼 있는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이..

 

중환자 실에서

번째 묵상 - “지친 희망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사람들

쉽게 일어나지 못한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처럼

그들은 마냥 누워있다.

 

움직이던 손가락이 조금씩 움직인다.

일어날 같은데..

다시 다음 손이 움직일 때까지 시간이 흐른다.

그들에게 시간은 멈춘 한데

기다리는 사람들의 시간은 계곡물처럼 빠르고 가파르게 흐른다.

 

희망도 지쳐간다.

두려움이 찾아온다.

가슴이 막혀온다.

이대로 일어나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아직 준비가 안되었는데.

무섭다.

다시 눈을 감는다.

다시 눈을 뜬다

이제 다시 희망을 품고 눈을 뜬다.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

 

하지만 여전히 지친 희망은 나를 무겁게 한다.

안되겠다.

지친 희망에 활기를 불어넣어야지.

주님, 저에게도, 엄마에게도 성령의 생기를 불어 넣어 주십시오.”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 괴로워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기다려라. 이제 내가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또다시 찬양하련다” (시편42:11).

 

9 23 중환자 실에서

여섯 번째 묵상-“나의 이기심

 

엄마를 향한 나의 마음은 이기적이었다.

나는 너무나 많이 엄마를 의지하고 살아 왔다.

많고 무거운 짐을 엄마의 어깨에 지우고,

나는 너무 편하고, 쉽고, 게으른 삶을 살아왔다.

 

엄마의 회복을 바라는 나의 마음은 여전히 이기적이다.

장애를 가진 형과 형수에 대한 부담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나의 이기심.

 

지금 엄마에게 가장 좋은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바라는 천국, 눈물도 슬픔도 없는 그곳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마음이 이기적인 바램이라 할지라도

나는 간절히 바란다.

엄마가 예전처럼 건강하게 다시 일어날 있기를..

하나님, 엄마를 지켜 주십시오.

엄마를 살려 주십시오

엄마가 건강하게 일어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베풀어 주십시오.

 

엄마의 회복을 바라는 나는 여전히 이기적인 아들이다.

 

11 26 아침 8

엄마는 수술실에 들어가셨다.

뇌에 흐르는 물은 뇌에서 흡수가 되어야 하는데

엄마의 뇌는 물을 흡수하지 못한다.

그래서 뇌에 물을 부분으로 흐르게 하는 작은 관을 뇌에서 배로 연결하는 수술이다. 수술은 간단하다고 하는데, 연로하신 어머니가 전신 마취에서 깨어나느냐가 관건이라고 한다.

 

845 수술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왔다.

나는 기도한다.

마음은 편하다.

시간이 흐른 같다.

 

아침 9:45 엄마의 수술이 끝났다는 연락이 왔다.

엄마는 중환자실로 다시 옮겨졌다.

입에는 산소마스크를 쓰고..

 

일평생 자식들을 위해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오신 엄마

작은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고도 힘들다고 마디 없이 살아온 엄마,

짐은 나와 함께 아니고, 오직 하나님과 함께 지고 살아온 엄마,

얼마나 무거웠을까?

진작 생각을 못했을까?

너무 이기적이 아들이었다.

 

짐을 이제 엄마는 내려놓을 있을까?

나는 짐을 엄마와 함께 나눠 있을까?

이런 질문을 하는 나는 아직도 이기적인 아들이다.

 

9 30

어머니는 조금씩 좋아지고 계시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억하고, 신뢰하면서도

여전히 한구석에는 불안한 마음이 있다.

어머니는 내일 일반 병실로 옮길 예정이다.

 

중환자실에 만난 사람들..

환자를 보고 나올 때마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조금 나아졌다고 하면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고 축하해 주던 사람들..

 

먼저 일반 병실로 옮길 때면

병이 낫지도 않았는데

중환자실에서 나왔다는 이유만으로도 축하해 주는 사람들..

 

중환자실에서 만난 사람들

가난하고, 연약해 밖에 없는 사람들

생과 사의 순간을 보고,

순간순간 절망과 기쁨을 함께 누리는 사람들

다름의 벽은 이상 아픔이 아니라

연약함의 공통점에서 만난 사람들

 

선묵이 엄마, 다연이 엄마 (다연이는 뒤에 하늘 나라에 갔다) ,

베트남에서 어린 소년,

아직 한참 자라야 하고, 부모의 기쁨이 아이들,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잠을 잔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어미의 마음은

아이들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리고, 기도하는 이들에게 나는 무엇을 말할 있나?

나는 오늘도 말없이 그냥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병원에 엄마와 함께 있으면서 묵상했던 연약함 저에게 주었던 그리고 경험했던 은총에 대해 나눴습니다. 세상은 자신의 가치를 보이라고 말합니다. 네가 어디에서 공부했고, 너의 가치는 얼마나 되고, 네가 얼마나 잘난 사람인가를 보이라고 말합니다. 너를 통해 내가 얻을 있는 유익/이익이 얼마나 되는지 보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이고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해야 합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연약함 실패자의 상징입니다. 세상은 강한 자를 영웅으로 칭송합니다. 동네 커뮤니티 센테에만 가도 많은 남자들이 자신의 몸을 강한 근육질로 만들기 위해 땀을 흘리고 있는 모습을 쉽게 있습니다. 특별히 남자는 강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합니다. 자신의 약한 것을 남에게 보인다는 것은 수치를 당한다고 생각합니다. “약함 자랑이 아니라 수치이고 패배입니다.

 

세상의 누가 자신의 약함 은혜로 생각할까요? 누가 자신의 약함을 보이고 싶어 할까요?

 

이젠 세상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성공한 사람, 잘나가는 사람이 대접받은 시대이고, 은혜 받은 사람으로 여깁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이 신앙의 성공이고,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젠 교회에서도 나의 약함 고백하고 나눌 자리가 없습니다. 연약함은 어두운 강대상 뒤에서 하늘을 향해 눈물을 흘려야 하는 부끄러움이 되었고, 신앙의 실패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이젠 누가 나의 연약한 손을 잡아 줄까요? 

 

저도 가능하면 연약한 나의 모습을 숨기고 싶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과 12 초반부에 자신의 약함 대해 말합니다. 복음을 전하다 돌에 맞고, 태장을 맞고, 심지어는 밤에 몰래 바구니를 타고 성밖으로 도망을 쳐야 해만 했던 자신의 비겁한 모습을 말합니다. 유대에서 사람들은 바울이 말이 어눌하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자랑할 있는 것은 오직 약함이라고 말합니다.

 

계속해서 12장은 자신의 신체적 연약함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겸손하게 만드는 어떤 병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 계시들은 엄청난 것이었기에, 때문에 내가 교만해질세라 육신에 가시가 주어졌습니다. 사탄의 심부름꾼이 나를 우쭐대지 못하도록 주먹으로 때렸습니다. (고후 12:7)

 

물론 우리에게 연약함은 자랑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자신의 연약함을 스스로 용납할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스스로 인정할 나와 타인에게,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보다 솔직할 있고, 자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사도 바울도 자신의 약함을 고쳐달라고 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은총을 넉넉히 받고 있다. 능력은 약함 가운데서 완성되는 법이다(고후12:9). 이제 바울은 자신의 약점을 오히려 자랑하고 나섰습니다. 바울은 약함 가운데 하나님의 은총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자신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의 힘이 약해질수록 오히려 강하게 작용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을 통해 강해지는 , 사람들 앞에 좀더 훌륭한 존재로 서는 , 영적 삶을 통해 윤리적으로 사는 등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약할 , 하고자 하는 일을 스스로 없을 , 때론 사탄으로부터 오는 악의 세력이 우리를 공격할 ,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에 더욱 마음의 문을 열게 되는 것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의 무능과 약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습니다. 형제 자매님들도 이런 경험을 해보지 않았습니까? 나의 약함 가운데서 들어난 하나님의 은혜를 말입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나는 약할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고후12:10). 매우 역설적입니다. 세상은 이해 수도 경험 수도 없는 역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매일을 삶에서 경험하는 실재입니다. 나의 약함이 오히려 진정한 강함이 되는 은혜 말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강함을 인정하고 바라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의 약함을 인정하고, 애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를 맞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강함은 하나님 앞에서 부러지나, 약함은 오히려 하나님 안에서 다시 세움을 얻습니다.

 

우리가 아는 예수님의 비유가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입니다.

누가복음 18:9-14절입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발리새파 사람의 기도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이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세리의 기도입니다.

       [멀리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염두도 못 내고, 가슴을 치며]

       ,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우리가 보기에는 바리새파 사람이 더 의로워 보입니다. 더 종교적이고, 더 경건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자기 집으로 내려 간 사람은 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세리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자신의 경건을 자랑하는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연약함, 자신의 상처, 그리고 자신의 악함과 죄를 고백하는 세리를 하나님은 받아주셨고, 또 그를 높여 주셨습니다. 우리의 강함이 아나리, 우리의 약함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축복의 통로가 됨을 기억하십시오. 나의 약함을 발견할 때, 누군가가 나의 약함을 지적할 때, 낙심하고 좌절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 약함으로 인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시간임을 기억하십시오.

 

안셀롬 그륀 신부는 약함과 상처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만나는 장소이기만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이제 이상 나아갈 수도 없고, 앞날에 대한 희망도 보이지 않아 포기하고 싶을 ,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고, 우리가 완전히 그리스도에게 내맡겨져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상처가 바로 우리 안에서 보물이 되시는 예수님을 찾고 만나는 장소이고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연약함을 부인하지 않을 , 나의 추함과 나의 악과 나의 상처와 정직하게 대면할 ,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 그것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과 추함 가운데 함께 계셔서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셜브륵 교회 공동체는 강함만을 자랑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나의 약함을 고백하고, 안에서 만난 예수님을 고백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강함을 통해 세워지는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의 연약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 그와 함께 안에서 몸이 되어가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대합니다.